아테네의 5월은 화창했다. 지중해 바다색을 닮은 하늘에서 내려꽂히는 따가운 햇살은 시내 가로수에 주렁주렁 열린 오렌지 색깔을 더 진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오렌지 하나를 따볼까 하고 차에서 잠시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기자를 태운 차가 도무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어서였다. 현지 가이드는 "노동단체들의 연일 계속되는 시위로 가뜩이나 좁은 아테네 시내 도로가 마비 상태"라고 투덜거렸다. 그리스를 국가 부도 위기까지 몰아가고 있는 재정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정부의 세금 개혁과 재정 지출 축소 방침에 반대하는 시위였다.

그리스가 지금 같은 위기에 몰린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넘기 위한 과다한 재정 지출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직접 찾은 그리스는 왜 이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그 속내를 잘 보여줬다. 그리스의 1인당 국민소득(GDP)은 약 2만8000달러로 2만달러를 오르내리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높다. 막대한 정부 지출을 동반하는 사회보장이 상대적으로 잘 돼 있는 데다 매년 이 나라 인구(1100만명)보다 많은 관광객이 고대 유적지를 찾아 돈을 뿌리고 가는 까닭이다. 한마디로 가만히 앉아 있어도 정부와 조상 덕에 먹고 살 수 있는 나라가 그리스다.

그리스에서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모든 등록금과 책값을 국가가 부담한다. 정부는 예산 부담을 줄이기 위해 책값이라도 개인 부담으로 하는 시도를 했지만 학생들의 시위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대학까지 진학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단순 노동직에 종사하는 공무원들도 퇴직 후에는 후한 연금을 받을 수 있어 굳이 공부에 매달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란다.

외국인 관광객이 넘치는 주요 관광지에는 영어 한마디 못하는 가게 주인이 수두룩하다. 유로 이외 다른 화폐로는 상품을 사기도 어렵고 카드 결제가 안 되는 상점도 많다. 한 커피숍에서는 커피를 마신 뒤 유로가 없다며 달러를 내밀자 종업원이 그냥 가라는 손짓을 했다. 귀찮게 달러를 받느니 차라리 공짜 커피를 제공하겠다는 게 이 나라 사람들이다.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주요 관광지는 평일인데도 오후 2시30분이면 티켓 판매가 끝난다. 폐장 시간을 몇 시간만 늦춰도 관광 수입이 엄청 늘겠지만 그리스 사람들은 한시라도 빨리 퇴근해 쉬는 걸 택했다. 놀기 좋아하는 국민성은 직장인의 평균 여름휴가 기간이 1개월,학생들의 여름방학이 3개월인데서도 잘 드러난다.

굳이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데 큰 지장이 없는 사회경제 시스템에 스스로의 문화에 대한 강한 자존심이 더해지면서 그리스는 변화와 경쟁을 거부하는 나라가 되었고 이것이 오늘날 이 나라를 세계 경제의 뇌관으로 만들어 놓고 말았다.

1453년 오스만튀르크(터키)의 지배 아래 들어갔던 그리스는 문화적 자존심을 지키고 변화를 거부한 덕에 무려 400여년이 지난 1832년 결국 독립을 쟁취했고 이슬람으로부터 자신들의 말과 종교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고집스러운 전통이 오히려 나라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는 상황이다.

과거 동서양의 문화를 혼합해 찬란한 헬레니즘 문화를 꽃피웠던 그리스가 이런 융통성을 다시 발휘해 위기를 털고 일어설지 두고 볼 일이다.

김선태 논설위원 k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