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두 쪽 나도 품질과는 타협하지 않겠다. "

장 마리 위르티제 르노삼성자동차 사장(59)이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얘기다. 완성차 업계 최고경영자(CEO)들의 숙제는 판매 확대이지만,그는 판매량보다 품질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해외 출장을 가더라도 매주 보고되는 품질 리포트는 꼭 챙겨본다. 품질 본부장에게는 언제든 생산라인을 세울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다.

위르티제 사장의 이 같은 품질 경영이 최근 들어 빛을 보고 있다. 승용차 SM3 · 5 · 7과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QM5 등 단 4종만 갖고도 10여 종의 라인업을 갖춘 GM대우자동차를 제쳤다. 내수시장에선 현대 · 기아자동차의 유일한 대항마다. 택시 기사들에게 르노삼성차는 '잔고장이 가장 적은 차'로 통한다.

위르티제 사장이 르노삼성에 부임한 것은 2006년 3월.당시만 해도 이 회사는 수출엔 거의 신경 쓰지 못했다. 2005년 한 해 동안 해외에서 판매한 차량이 3610대에 그쳤다. 그는 소형차인 SM3부터 신흥시장 위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작년엔 총 5만6000여대를 수출했고,올 1분기에만 작년 판매량의 40%(2만2400대)를 해외에서 팔았다. 르노삼성 출범 10년 만의 최대 실적이다.

◆파리의 '맹모삼천지교'

[CEO & 매니지먼트] 인물탐구 - 장 마리 위르티제 르노삼성 자동차 사장
위르티제 사장은 알프스 산맥 인근의 프랑스 투르 출신이다. 자식에 대한 부모님의 교육열이 워낙 높아 어릴 때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

최근 프랑스는 한국처럼 사교육 열풍이 거세지만,그가 학창 시절을 보낸 1960년대만 해도 과외가 그리 성행하진 않았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학습능력이 떨어지는 친구들을 돕곤 했다. 위르티제는 친구들을 가르치는 쪽이었다. 특히 물리와 수학에 재능을 보였다.

그의 고교 진학과정은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를 연상케 한다. 처음엔 파리 외곽 집 근처의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시내의 핵심 학군에 비해 면학 분위기가 떨어지는 것을 걱정하던 부모님이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주소지를 시내로 옮기는 것이었다. 당시 프랑스에선 흔치 않은 일이었다. 위르티제는 그 덕에 명문인 콩도르세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고교 졸업 후 엘리트 양성 학교인 그랑제콜의 하나인 국립 교량-도로 대학(l'Ecole Nationale des Ponts et Chaussees)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했다. 1993년엔 세계 정상급 경영대학원인 인시아드(INSEAD)에서 MBA를 땄다. 모국어인 프랑스어 외에 영어와 스페인어,독일어를 구사할 수 있다. 한국어로도 간단한 의사소통 정도는 할 수 있다.

◆'로간' 성공을 발판 삼아

위르티제 사장의 경력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로간'이다. 르노그룹이 신흥시장을 겨냥해 전략적으로 개발한 소형차다. 그는 1999년부터 6년간 루마니아에 있는 르노그룹 산하 다시아에서 로간 프로젝트 총괄 업무를 맡았다.

우선 소득 수준이 낮은 나라들을 겨냥한 것인 만큼 가격을 6000달러 이하로 맞춘다는 분명한 목표를 정했다. 세단과 함께 7인승 왜건과 상용차,픽업트럭,해치백 등 다양한 스타일로 로간의 영역을 넓혔다. 루마니아에서 대성공을 거둔 로간은 지금도 러시아와 브라질 멕시코 중동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전 세계로 판매국을 늘려가고 있다.

위르티제 사장은 "단순한 기능만을 갖춘 합리적 가격대의 차를 만들자는 계획이 적중했다"며 "초기 개발 단계부터 사후관리까지 완성차 프로젝트를 총괄했던 경험이 르노삼성을 경영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로간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2005년 프랑스 주간 산업지 '뤼진 누벨(L'Usine Nouvelle)'로부터 '올해의 엔지니어'상을 받았다.

◆카를로스 곤 회장과의 인연

위르티제 사장은 로간 프로젝트를 이끌면서 카를로스 곤 르노-닛산 회장 겸 CEO와 자주 만날 기회를 가졌다. 곤 회장은 문제를 단순화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인물이다. 복잡한 이슈를 간단 명료하게 정리해 직원들과 교감의 폭을 넓히는 식이다. 또 항상 회사나 부서의 목표를 명확하게 설정했다. "곤 회장의 경영 방식을 상당 부분 르노삼성에 접목하고 있다"는 게 위르티제 사장의 얘기다.

위르티제 사장은 로간 프로젝트를 끝낸 뒤 '변화'를 원했다. 변화의 시작은 한국이었다. 그가 르노삼성 사장직을 택한 것은 독립된 완성차 업체를 운영할 수 있는 값진 경험을 할 수 있어서다.

엔지니어 출신인 그는 부임 직후부터 자사 연구원이나 품질 담당자들과의 토론을 즐긴다. 새로운 기술 트렌드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원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세부적인 기술까지 꼼꼼하게 지적한다는 게 임원들의 설명이다.

위르티제 사장은 매주 월요일 본부장급 회의를 서울뿐만 아니라 부산 공장,경기 용인 기흥연구소 등에서 번갈아 열고 있다. 현장 목소리에 좀더 귀를 기울이자는 뜻에서다. 절대적인 생산량이나 판매량 대신 당초 목표대로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는지 등을 주요 성과지표로 삼는 것도 곤 회장에게서 배운 경영 방식이다.

◆"한국색을 가진 신차를 만들라"

"한국인들은 자동차가 시끄러운 걸 굉장히 싫어합니다. 유럽에선 엔진 배기음을 하나의 사운드(소리)로 평가하는데 한국에선 노이즈(소음)로 간주하죠.에어컨이나 내비게이션 장착률 면에서도 한국과 유럽 소비자 간 격차가 큽니다. 한국 문화를 이해하고 한국 소비자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가장 중요합니다. "

지난 1월 선보인 뉴 SM5는 현대차 쏘나타에 이어 중형 세단 2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정숙성을 강조한 설계와 한국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편의장치가 인기 비결로 꼽힌다. 작년 하반기에 내놓은 준중형 세단 뉴 SM3는 중형급 크기로 설계됐다는 점 덕분에 베스트셀링카 반열에 올랐다.

위르티제 사장은 "한국인들은 실내 정숙성을 굉장히 중시하는 데다 외형적으로 큰 차를 선호하고 있다"며 "유럽 기업을 모회사로 두고 있는 르노삼성이 한국에서 성공적으로 안착한 데는 이런 한국적 특색을 잘 반영한 덕분"이라고 말했다.

르노삼성은 내년 여름 이후 준대형 세단 SM7 후속을 내놓는 데 이어 소형차도 출시할 계획이다. 차종을 확대해야 소비자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한국의 모든 산을 정복하는 게 꿈

지난 1월 말 위르티제 사장은 서울 아차산을 등반하는 임원단합대회를 추진 중이란 보고를 받았다. 그는 "아찬산은 산(mountain)이 아니라 언덕(hill) 수준인데 거창하게 등산이란 표현을 쓸 수 있겠느냐"며 단합대회를 겨울스키로 바꿨다. 추후 더 높은 산을 선택해 임원들과 등산에 나서기로 했다.

알프스를 보고 자란 그에게 아차산은 산이 아니라 언덕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 꼭 이루고 싶은 소원 중 하나로 "한국의 명산들을 모두 다 오르겠다"고 할 정도로 등산 마니아다.

한국 생활 5년째인 위르티제 사장은 한국산 폭탄주에도 익숙하다. 하지만 프랑스인으로서 와인에 대한 애정은 숨길 수 없다고 한다. 그는 "한국을 하나씩 알아가면서 커다란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며 "한국 기업인 르노삼성 CEO로서 항상 최고의 품질을 갖춘 제품을 만들겠다는 초심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재길 기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