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금 건졌으니 다행" 거치식펀드 뭉칫돈 빠져
"고객님,올해 기업들이 사상 최대 실적을 낸다고 합니다. 증시는 좀 더 오를 거란 전망이 대세고요. 3월 이후 8조원 넘게 산 외국인을 보면 추가 상승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신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요. "(영업직원) "언제 주가가 빠진다고 한 적 있어요? 이제 그만 환매해 주세요. 금융위기로 2억(원)이 1억(원) 밑으로 빠졌을 땐 얼마나 아찔하던지…."(고객)

지난 9일 서울 테헤란로에 있는 A증권 지점.장 마감 무렵 50대 여성 고객이 들어왔다. 수수한 차림의 평범한 가정주부로 보였지만 "그만 찾고 싶다"며 내민 국내 주식형펀드 계좌에는 2억원에 달하는 거금이 들어 있었다. 이 고객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번엔 환매를 작심하고 나온 모습이었다.

A증권 PB는 "작년 9월 이후 3개월여 간격으로 1700선을 세 번이나 돌파했지만 두 번씩이나 다시 밀린 탓인지,이 고객은 '무조건 환매'만 고집했다"고 전했다.

◆뭉칫돈 환매 늘어난다

11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상장지수펀드(ETF)를 제외한 국내 주식형펀드는 지난달 24일 이후 이달 8일까지 12영업일 연속 자금이 빠져나갔다. 이 기간 순유출액은 3조1000억원에 달했다. 특히 이달 들어 일평균 3700억원 이상 순유출이 일어나 총 2조2300억원이나 빠져나갔다.

한국경제신문이 지난 9일 펀드 환매 현장에 있는 9개 증권사 지점장과 영업담당자 94명을 대상으로 펀드 대량 환매 관련 긴급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실제 창구에서 느끼는 최근의 환매는 수익을 낸 적립식보다 상대적으로 수익률이 떨어지는 거치식의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펀드 환매 중 적립식 비중을 묻는 질문에 '40% 이하'라는 응답이 37.2%(35명)로 가장 많았다. 이어 적립식 비중이 '40~60%' 또는 '60~80%'가 똑같이 27.7%(26명)를 차지했다. 소액 적립식펀드를 주로 판매한 은행이 조사 대상에서 빠지긴 했지만 이번 환매는 거치식 투자자들이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앞서 지난해 9월과 올 1월 두 차례 지수 1700대에선 전체 환매 중 적립식 고객 비중이 80%에 달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최영남 우리투자증권 GS타워WMC센터장은 "거치식 환매 비중이 70% 이상인 데다 환매액이 평균 5000만원을 웃돌며 한꺼번에 5억원을 빼간 고객도 있다"며 "수익률과 지수 흐름에 민감한 거액 자산가들이 많이 환매해간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미래에셋증권의 지점장은 "원금을 회복하지 못한 거치식 고객들도 이 정도면 최악은 면했다는 생각에 과감하게 결심한다"면서 "반면 적립식 투자자는 환매보다는 당분간 월 납입을 끊을지 아니면 계속 넣을지 고민한다"고 전했다. 그동안 학습효과를 통해 적립식은 '그래도 낫다'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이 환매하는 주된 이유로 응답자의 58.1%(55명)가 '원금 회복'을,35.1%(33명)은 '차익 실현'을 꼽았다.

◆재투자 대신 단기상품 대비

펀드를 환매한 투자자들은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해 종합자산관리계좌(CMA)나 머니마켓펀드(MMF) 등 단기 상품에 예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의 63.8%(60명)가 '단기 상품'에 예치한다고 답했고 '출금'이 주를 이룬다는 응답자도 23.4%(22명)였지만 '재투자'는 12.8%(12명)에 그쳤다. 한 영업직원은 "서울 아파트 전셋값이 사상 최고 수준으로 치솟자 전셋값을 올려줘야 한다며 출금하는 생계형 환매도 있다"고 귀띔했다.

재투자하는 고객들은 주가연계증권(ELS),원자재펀드 등 대안상품에 넣거나 주식 직접투자로 이동한 것으로 조사됐다. '대안상품 투자'와 '직접투자'로 옮겨간다는 응답이 각각 26.6%(25명)로 전체의 절반을 넘었다. 증권사를 통해 펀드에 가입한 투자자들은 은행 투자자보다 위험 선호 성향이 높아 직접투자로도 상당부분 이동한 것으로 분석된다.

조재형 현대증권 개포지점장은 "삼성그룹주나 일부 성과가 좋은 펀드를 제외한 상당수가 코스피지수 상승률보다 부진해 주식 직접투자에 나서거나 자문형 랩어카운트에 가입하곤 한다"고 말했다.

최근 인기가 높은 소매채권(15.9% · 15명)으로도 환매 자금이 옮겨가고 있다. 우리투자증권 PB는 "12일 발행되는 2년 만기 A-급 웅진홀딩스 회사채 선착순 예약을 받았는데 고객들이 앞다퉈 사겠다는 의사를 보였다"고 말했다. 환매 후 증권사를 이탈해 은행 부동산 등 다른 투자처로 이동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는 전언이다.

서정환/박민제/서보미 기자 ceose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