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초년생인 20대 중반 여성들에게는 '골드미스'라는 말이 멀게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시간의 속도는 나이와 비례한다'는 말처럼 서른 살을 맞이한 이들은 '내가 어느새 이렇게 됐지'라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30대 중반에 이른 여성에게는 수능시험을 앞둔 고3처럼 '골드미스'라는 단어가 눈앞에 다가온다. 결혼한 친구들과의 관계,건강 관리,결혼과 독신 등 다양한 과제에 대한 새로운 마음가짐을 요구받는 시점인 것이다.

직장에서 정체성을 정립하는 것도 골드미스 문턱에 선 이들에게 주어진 과제 중 하나다. 작년 말 결혼정보회사 듀오가 여성 직장인 33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여성들이 생각하는 직장생활의 가장 큰 적은 다름 아닌 '여자 상사'(48%)였다. 뒤집어보면 직장생활의 가장 큰 걸림돌이 여자 신입사원이란 얘기와도 통한다. 입사 5년이 넘어가면 부서의 마스코트로 관심을 한몸에 받던 상황에서 어느새 아래로는 차기 마스코트들을 경계하고 위로는 실력을 인정받아야 하는 미묘한 위치에 선다. 그들은 어떤 마음가짐일까. 그들에게 골드미스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자칭 혹은 타칭 '예비 골드미스' 5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나는 골드미스 후보자?

인터뷰에 응한 예비 골드미스들은 입사 5~7년차 직장인이다. 우선 이들에게 골드미스의 조건을 물어봤다. 이들이 생각하는 골드미스의 연령은 대부분 '33~34세부터'다. 경제력 면에선 연봉이 최저 5000만원에서 최고 1억원 정도는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안회사에서 일하는 김성경씨(32)는 "경제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자립한 여성이라야 골드미스"라고 강조했다. "혼자 살기 버거울 거 같다는 생각에 결혼을 떠올린다면 골드미스로선 자격 미달이라고 봐야죠.외로움은 물론 '혼자 사는 나이 든 여자'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에 휘둘리지 않는 당찬 여성이라고 생각해요. "

호텔 마케팅팀에서 근무하는 강정혜씨(33)도 맞장구를 쳤다. "솔직히 20대에는 많은 여성들이 애인보다는 일,결혼보다는 직장에서의 성공을 꿈꾸죠.하지만 서른 살 무렵부터 가정,출산,육아 등으로 마음이 기울기 시작해요. 골드미스는 이 부분에 얽매이지 않고 '마이웨이'를 걷기 시작한 것이라고 봐요. "

골드미스 하면 연상되는 이미지를 묻자 다들 '당찬 여성','일 잘하는 여자','럭셔리한 여자' 등을 열거했다. 고등학교 중국어 교사인 박은지씨(32)는 '독한 여자'라는 단어가 떠오른다고 했다.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얼마나 다그쳤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또한 겉으로 강한 척하지만 속으로 얼마나 울었을지 안쓰럽기도 하고요. "

직장에선 정체성 적립 시기

골드미스의 문턱에 선 이들의 직장생활을 한마디로 표현해달라고 하니 '사춘기'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아래로는 신입사원들이 치고 올라오고 위로는 직장상사들에게 실력을 입증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란다.

김성경씨는 지난달부터 퇴근 후 영어학원에 다니고 있다. 올초 같은 부서에 배치된 여자 신입사원이 미국에서 온 클라이언트를 상대로 유창하게 통역해 입사하자마자 화제가 된 것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김씨는 "보안업체라 영어를 많이 쓸 일이 없어 공부를 게을리한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며 "회사에 남자들이 많아 신입 때는 밥값 걱정을 안 했는데 이제는 학원비에다 밥 살 일도 많아지니 지갑이 눈에 띄게 얇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강정혜씨는 "신입사원이 들어오니 업무량이 두 배로 늘었다"고 푸념했다. "업무는 늘었는데 신입은 아직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밤 11시 퇴근이 일찍일 정도죠.신입들 교육까지 맡았어요. 그런데 회사 사람들은 신입에게만 '힘들지' 하고 물어요. 한마디로 서러울 뿐이죠."

외국계 컴퓨터업체에서 일하는 곽영은씨(33)는 "문제는 후배들이 아직 업무 숙련도가 낮은 것일 뿐,현재 가진 능력은 상사를 능가한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요즘 애들'은 학벌이 좋든,집안이 잘 나가든,외국어가 네이티브 수준이든 무기 하나씩은 들고 입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저들보다 나은 인간이 되는 것에 집착해요. 내 업무에서만큼은 후배는 물론 남자 동료와 비교해도 최고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 노력하죠.그러려면 'T자형 경력'을 쌓아야 해요. '넓고 얇게 알되 한 분야는 전문가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죠."

능력이 다시 나를 피어나게 하리라

통통 튀는 여자 신입사원들이 눈에 거슬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마냥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있었다. 강정혜씨는 "싫든 좋든 함께 일해야 할 사람들이니 적보다는 친구가 되기 위해 월 1회짜리 '여우회식'이란 모임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도 비슷한 견해다. 고지마 다카코의 <여자 서른다섯,경쟁력 있는 나를 위한 히든카드>(전나무숲)에는 '감점법으로 보지 말고 가점법으로 보라'는 말이 있다. 상대방에게 '구두가 촌스러워' '화장이 저게 뭐지'라고 흠집을 내는 것으로는 인간 관계를 넓힐 수 없다. 대신 '손재주가 있구나' '아이디어가 많아' 등 장점을 보려 하는 태도는 사람을 끌어모으게 된다는 것이다.

<승진하는 여자 짤리는 여자>(김연우 지음,비전코리아)에서 저자는 여자들이 승진 못하는 이유를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한다 △야근과 회식을 싫어한다 △아부와 사내정치를 혐오한다 △회사 분위기와 개인적인 분위기를 구분하지 못한다 등으로 정리했다. 저자는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 최고의 근육을 선물한다"고 강조한다. 나쁜 상황을 겪어야 위기를 이겨낼 수 있는 근육이 생긴다는 것이다.

김성경씨도 이 말에 동의하며 "지난해 말부터 부서 회식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밤 12시 통금이다' '몸이 안 좋다' 등 각종 핑계로 회식을 피했더니 남자 동료나 상사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없고 특히 사내 정보에 어두워졌다는 걸 느꼈어요. 집단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집단활동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결심한 거죠."

나이들면 밀린다고? 용납할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아름다움을 뒷전으로 미룬 것은 아니다. 은행에서 올해 대리로 승진한 김정아씨(32)는 최근 뷰티숍에서 속눈썹 붙이는 시술을 받았다. 김씨는 "직장에서 외모로 인정받길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이 들면 밀린다'는 건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곽영은씨도 "외모에 신경쓴다고 해서 업무능력이 떨어진다고 여기는 건 편견"이라고 말했다. "저는 한 달에 수첩을 한 권씩 써요. 꼼꼼히 메모하고 확인하는 습관을 들인 덕이죠.업무 효율이 높아 일주일에 한 번 등마사지 받을 시간 정도는 충분해요. 그리고 지시한 건 반드시 확인해서 별명이 '진드기'예요. 업무에 빈틈이 없는 건 좋지만 요즘 들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머랜다가 될 날도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부쩍 들기도 하죠(웃음)."

최진석 기자 isk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