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직업병일 것이다. 습관적으로 아무데서나 '원고 교정'을 본다. 틀린 낱말과 잘못된 글의 용례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잘못 표기된 식당 차림표,텔레비전 자막들이 눈에 띈다. '찌게'는 '찌개'로 써야 맞다. '육계장'이 아니라 '육개장'이다. 텔레비전 자막(字幕)은 '-했던'과 '-했든'을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앞의 것은 과거를 나타내는 어미(語尾)이고 뒤의 것은 선택을 나타내는 어미 '-든지'의 준말이다.

대개의 경우 맘속으로 교정하고 지나치지만 식당주인에게 직접 알려주거나 방송국에 전화를 걸기도 한다. 과민한 처사임은 분명하지만 작가인 걸 어떡하랴.

말이라는 건 시절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원칙을 지키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집웅'이 '지붕'이 되고 '삯월세'가 '사글세'로 되었다. 말이란 생물처럼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 많은 사람들이 으레 쓰는 대로 굳어지게 돼 있다. '으레'도 '의례'에서 변한 말이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을 표준어로 정하는 데는 중앙집권적인 권력 요소가 작용한다고 볼 때,말의 변화와 풍부한 지역어의 수용(受容)은 말을 운용하는 작가들이 고민해야 할 숙제다. 표준어 규정이 때에 따라 변하는 것도 그런 고민에 의해서다.

그러나 시절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말의 규정이 있으니 '존대법'이 바로 그것이다. '새로운 표준어 규정'은 들어봤어도 '새로운 존대법 규정'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럴까. 요즘 존대법은 참으로 어지럽게 들린다.
젊고 어린 사람들이 존대를 모르고 예의 없이 말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존대가 넘친다. 넘치다 못해 불쾌하다. 넘치고 넘치므로 불쾌해도 일일이 다 교정하기 어렵다. 이런 정도라면 차라리 '새로운 존대법 규정'을 제정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만큼.

'이 스파게티는 면이 좀 굵게 나오시고요…'라는 말을 종업원에게서 듣는다. 백화점에서는 '새로 출시(出市)된 셔츠는 소매가 약간 짧으시고요…'라는 말도 듣는다. 계산을 하려고 하면 '삼만 육천원이세요'라고 말한다. 아귀탕이나 삼겹살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다. '맵게 나오시는' 아귀탕이나 '육질이 부드러우신' 돼지고기를 먹고 나면 그 값이 '이만 사천원이시'다. 병원엘 가면 '항체가 형성되시는 데는 최소 2주일 이상 걸리신다'고 한다. 넘치는 친절과 존대를 받으면서 불쾌해지는 이유다. '새로운 존대법 규정'으로 이와 같은 사정들을 모두 수용해 버린다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여전히 불쾌할 것 같다. 실제로는 친절과 예의가 자취를 감추어가는 세상인데 특정 공간에서만 이토록 친절과 존대가 남 · 오용되기 때문이다. 묘한 불협화음(不協和音)이다. 기분이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이유다.

작가가 과민한 거라면 그들의 친절과 존대는 과잉이다. 남자가 바지 주머니에 두 손 착 붙이고,여자가 배꼽 위에 두 손을 겹쳐 얹고 45도 각도로 고개를 숙인다고 해서 다 친절하고 예의바르게 비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제공하는 스파게티와 셔츠와 아귀탕과 삼겹살이 볼품없는 거라면,시도 때도 없이 '시'자를 우겨넣는 묘한 존대법은 '허구(虛構)의 어법'이며 '불쾌의 어법'임에 분명하다.

친절과 예의가 가치로 평가되는 세상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생산하고 제공하는 제품에 대한 확고한 자기 믿음,그 충만한 자긍심(自矜心)만이 초조와 불안과 조급증(躁急症)이 불러오는 '어색한 불협화음의 존대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럴 때 친절은 마침내 의연한 친절이고,예의는 비로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예의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