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구의 베네치아로 불리는 스웨덴 스톡홀름은 '아름다운 물의 도시'다. 그러나 한겨울 스톡홀름은 '근대 철학의 아버지' 르네 데카르트를 폐렴으로 죽게 만들었을 정도의 혹독한 추위로도 유명하다. 스톡홀름 시내의 대표적 번화가인 마스터 사뮤엘스가튼(master samuelsgatan).서울로 치면 명동 격에 해당하는 이곳에 세계 최대 패션업체 H&M 본사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면 '패션 1번지'의 느낌을 갖기 어렵다. 영하 15도의 매서운 추위에 거리는 온통 칙칙한 롱코트에 털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칭칭 감아 중무장한 사람들뿐이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전 세계 여성들이 열광하는 패션 디자인이 나올 수 있을까. ' 이런 의문은 H&M 본사 로비에 들어서면서 해소됐다. 외투 속에는 세련된 블랙과 그레이 톤으로 완벽하게 매치한 '레이어드 룩'이 숨어 있었다. 20년간 H&M의 수석디자이너로 활동한 마가레타 반덴 보쉬 디자인 고문은 이 같은 북유럽의 패션을 '쿨(cool)'이란 한마디로 정의했다.

패션뿐 아니라 가구,조명,가전,자동차에 이르기까지 산업 디자인의 전 영역에서 '북유럽 디자인'이 각광받고 있다. 현대 디자인의 흐름을 주도하고,전 세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는 북유럽 디자인의 매력은 무엇일까.

◆지리적 환경이 만든 걸작

흔히 북유럽 디자인을 '스칸디나비안 스타일'로 분류한다. 스칸디나비아는 북해와 발트해로 둘러싸인 산악지대 반도를 가리키는 말로 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 등 북유럽 4개국이 있다. 이곳은 서유럽에 비해 상당히 불리한 여건이다.

겨울이 유난히 길고 추울 뿐 아니라 유럽의 변방이어서 다른 지역과 교류가 활발하지 못하다. 이 같은 열악한 환경이 스칸디나비아만의 고유한 문화를 탄생시켰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또 추위 탓에 집안에 머무는 시간이 많다보니 오랫동안 질리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실내 조명 · 가구 · 인테리어 소품 등이 발달했다.

◆질리지 않는 '단순미'

'스칸디나비안 스타일'은 군더더기가 없다. 절제와 단순함을 추구하며 어느 공간에서나 잘 어울리는 은근한 매력이 특징이다. 오디오 한 대가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덴마크 명품 가전 '뱅앤올룹슨'이 좋은 예다. CD 6장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심플하게 디자인한 CD플레이어 '베오사운드9000'은 1996년 출시 후 지금까지 스테디셀러로 각광받고 있다. 14년여 동안 내부 기술만 업그레이드되었을 뿐 디자인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보이기 위한 화려한 장식보다 꼭 필요한 기능으로 사용자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디자인을 추구하는 것이 뱅앤올룹슨의 디자인 철학이다. 데이비드 루이스 뱅앤올룹슨 수석디자이너는 "단순해서 특별해 보이지 않는 것이 북유럽 디자인"이라고 강조했다.

스웨덴의 대표적 보드카 브랜드인 '앱솔루트' 병에서도 스칸디나비안 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 술을 따르기 쉽게 병목 부분이 길지도 않고,투명한 액체를 숨기기 위해 컬러 유리를 사용하기보다 속이 훤히 보이는 투명한 디자인을 채택했다. 창립 100주년을 맞은 1979년 미국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개발한 '링거병' 스타일의 병 디자인은 갈색 라운드형의 불투명 병이 주류를 이루던 보드카 시장에 '혁명'으로 받아들여졌다. 출시 초기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패를 점쳤지만,앱솔루트는 예상을 통렬히 깨트리며 오늘날 보드카 병 다자인의 심볼이 됐다.

◆자연에서 흘러나온 강렬함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은 자연과 함께한다. 자연에서 디자인 모티브를 빌려 오거나 재료의 특성을 속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살리는 데 주력한다. 스웨덴 생활가전업체 일렉트로룩스가 선보인 로봇 청소기 '트릴로바이트'의 경우 제품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삼엽충을 모티브로 디자인했다고 한다.

자연에서 얻은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은 간결하지만 독특한 색감과 조화를 이뤄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유명 부티크 호텔이나 인테리어 잡지를 통해 스칸디나비안 스타일의 가구들을 자주 접할 수 있다. 특히 덴마크 가구 '프리츠 한센(Fritz Hansen)'에서 선보인 '에그 체어(Egg Chair)'는 북유럽 가구가 집중 조명받는 계기를 마련한 제품으로 꼽힌다. 북유럽 디자인의 거장 아르네 야콥센의 작품으로 따뜻한 색감의 스완 의자,개미 의자 등도 유명한 제품이다.

80년 전통의 스웨덴 핸드메이드 문구 '북바인더스디자인'은 다양한 천연 컬러와 간결한 디자인이 조화를 이뤄 20~30대 여성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이들은 "너무 비싸요"라고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북바인더스만의 고급스러운 디자인에 매료돼 결국 지갑을 열고 만다.

◆사람을 생각하는 디자인

북유럽 스타일은 단순한 디자인만큼 기능도 단순 명료하다. 이것저것 복잡한 기능을 적용하는 대신 사용자가 꼭 필요로 하는 기능만 제품에 적용한다. 스웨덴 자동차 '볼보'의 내부 인테리어도 이 같은 디자인 철학이 그대로 반영돼 있다. 내부 모든 버튼이 큼직하며,운전 중 시야를 전방에서 떼지 않고 손의 감각으로 주변기기를 작동할 수 있게 했다. 춥고 매서운 날씨의 스웨덴 운전자들을 위해 두꺼운 장갑을 낀 손으로 조작이 가능하도록 계기판을 크고 간단하게 만든 것이다.

스웨덴 가구 브랜드 '이케아(IKEA)'는 '싸고 예쁜 북유럽 가구'의 한 전형이다. 매 시즌 다양한 컨셉트와 세련되고 실용적인 디자인의 아이템을 내놓는 것은 물론 가격대 역시 매력적이다.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기존 북유럽 가구들과 달리 이들은 커다란 창고형 매장을 운영한다. 고객이 제품을 구입하면 일단 고객 집까지 배달해 준 뒤 조립은 고객이 직접 하는 방식으로 가격을 낮췄다. 편리성과 실용성을 모토로 쉽게 쓰고 쉽게 바꿀 수 있는 북유럽 가구를 대중에 보급하고 있는 셈이다.

스톡홀름(스웨덴)=안상미 기자 sara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