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인사철이다. 해마다 이맘 때쯤이면 사내에 이런 저런 얘기가 돌아다닌다. 뚜껑이 열리기 전엔 온갖 설(說)이 난무한다. 인사가 끝난 다음엔 뒷말이 무성하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외치는 사람들도 많아진다. 금방 사표를 쓸 것처럼 떠벌리다가 처자식 생각에 이내 접어버리는 새가슴들도 넘쳐난다.

인사가 코 앞인 회사에선 사랑방 인사가 한창이다. "정확히 인사를 언제 한대?" "이번엔 우리 부장이 바뀐대?" 두 사람만 모이면 인사 얘기다. 세 사람이 함께하면 "이번에 누구는 발탁되고,누구는 물먹을 것"이라며 아예 인사 발령을 내 버린다.

김 과장,이 대리들은 설 연휴 동안 인사로부터 초연해지고 싶었지만 마음같지 않았다. 인사가 끝났으면 끝난 대로 '새 부장에게 어떻게 잘 보일지'를 걱정해야 했다. 인사를 목전에 두고 있으면 '나는 어떻게 될까'를 두고 수백 개의 시나리오를 써보기도 했다. 새로운 부서에서 어떻게 살아 남고,낯선 사람들과 얼마나 빨리 적응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은 월급쟁이들이 인사 때마다 겪어야 하는 숙명이다.

◆"요직,알고보니 지뢰밭"

중견기업 기획조정실에서 일하던 장석호 과장(38).그는 갖가지 신규 사업 아이디어를 제안하며 사내 수상을 휩쓸다시피 한 우수 사원이다. 장 과장은 이번 인사에서 인기부서 중 하나인 영업기획팀으로 발령났다. 그러나 웬걸.첫 출근 날부터 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팀원 전원이 자신과 말을 섞으려 하지 않았다. 밥도 같이 먹으러 가길 꺼렸다. 처음엔 단순한 시기나 견제려니 했다. 환영 회식 때 이유를 듣고 기겁을 했다.

팀원들은 이구동성으로 "당신 때문에 죽을 고생을 했다"고 입을 모았다. 지난 5년간 장 과장이 기획한 갖가지 신규사업을 진행하느라 생고생을 했다는 설명이다. 한 직원은 술김에 "영업의 고통을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통밥만 굴려 출세하려는 인간"이라며 장 과장을 쏘아붙이기까지 했다. 장 과장은 "이후 사업기획을 할 때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써야 한다는 걸 느꼈지만,지금도 새로운 부서에 적응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고 말했다.

한 대기업에서 승승장구하던 이태우 과장(37)도 최근 인사에서 조직의 쓴맛을 봤다. 올해 초 처음으로 본사가 아닌 수원의 생산 공장으로 옮기면서 모든 게 꼬이기 시작했다. 새로 근무하는 가전마케팅팀의 팀장부터 말단 사원까지 이 과장을 냉랭하게 대했다. 영문을 몰랐던 이 과장은 옆 부서에서 일하는 동기로부터 자초지종을 전해 듣고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본사 마케팅팀에 있던 시절 본의 아니게 이곳 팀원들에게 무리한 목표 등을 제시했던 게 원인이었다. 이 과장은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를 설명하고 팀원들의 마음을 돌려놓기까지 상당한 술값을 쏟아부어야 했다"고 토로했다.

◆벙어리 3개월,귀머거리 3개월

은행원 황모 과장(36)은 두 달 전 인사에서 물을 먹었다. 승진에서 미끄러진 것은 물론이고,원하지 않은 상품개발 부서로 옮겨야 했다. 홧병이 날 것 같아 본인이 맡은 새 업무에 아예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새 부서의 사람들과는 친해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일은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 그의 직장생활 신조였기 때문이다.

황 과장이 새 부서원들과 빨리 친해지기 위해 쓰는 방법은 '무조건 공개'다. '남들보다 먼저 자신에 대해 알린다'는 생각으로 대하면 처음보는 사람들과도 쉽게 친해진다는 것. 그는 "사람이 맘에 들면 그 부서가 좋아지고,싫어하던 일까지 좋아하게 된다"며 "일보다 같이 일하는 사람이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보험 영업소장인 최모 과장(40 · 여).매번 인사 때마다 다른 영업소를 맡아 새로운 보험 모집인을 관리하는 게 늘 스트레스였다. 최 과장은 몇 번의 인사를 통해 그만의 비법을 터득했다. 항상 갓 시집 온 새색시라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보험모집인을 시누이나 시어머니로 생각하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부임 초기엔 시집살이하는 새색시처럼 '벙어리 3개월,귀머거리 3개월'의 생활을 실천한다. 열 받아도 내색하지 않는다. 자신에 대한 모집인들의 평판도 달게 받는다. 그래야만 즐겁고 소신있게 일할 수 있다는 게 그의 경험이다.

◆황태자를 벤치마킹하라

새 부서에 빨리 적응하기 위한 지름길은 부서장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다. 물론 부서 내 선 · 후배와 원만하게 지내고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렇지만 원만한 직장생활을 위해서는 뭐니뭐니 해도 부서장의 눈에 드는 게 급선무다.

중견 기업에 다니는 이재현 과장(38)은 나름대로의 새 부서 적응 노하우를 갖고 있다. 새 부서에서 부서장이 가장 총애하는,이른바 '황태자'가 누군인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이후 그 황태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한다. 어떤 점이 부서장에게 호감을 줬는지를 파악한 뒤 그를 벤치마킹하는 게 이 과장의 처세술이다. 이 과장은 "가끔 비굴하다는 생각도 들지만,이런 노력 덕분에 입사 후 현재까지 세 개 부서를 거치면서 별 다른 어려움 없이 '연착륙'할 수 있었다"며 "연말 인사고과에서도 늘 상위권에 올랐다"고 자랑했다.

제약회사 홍보팀에 근무하는 차용기 과장(38)은 '막내 포섭하기'가 필살기 적응법이라고 추천한다. 막내가 팀내에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하기 때문에 팀 사정을 가장 잘 알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게다가 불만도 가장 많은 편이어서 팀 내 개선의 여지가 있는 사항을 재빨리 파악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차 과장은 "막내를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 돈도 적게 들면서 알짜 정보를 알 수 있는 가장 경제적인 방법"이라고 말했다.

◆호감형 인간이 돼라

지방공무원인 윤모 과장(40)은 새 부서에서 빨리 적응하기 위해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점을 각인시키는 데 주력한다. '박힌 돌'들이 '굴러온 돌'에 대해 내리는 평가는 대부분 일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집중되는 편이라고 생각해서다. 능력보다는 인간성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윤 과장은 우선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것으로 인간성 테스트에서 고득점을 얻고 있다. 다음에는 기존 직원들에게 "막일은 나의 것"이라고 외치고 다닌다. 무거운 물건을 옮기고 정수기에 물 채워넣기 같은 힘쓰는 일부터 회의 다과 준비나 난에 물주기 같은 허드렛일까지 도맡아 한다.

업무와 관련해서는 절대 아는 척을 하지 않는다. 처음 온 사람이 너무 나서면 '나대고 건방지다'는 말밖에 듣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부서 직원들의 각종 기념일을 챙기는 데 선수다. 이때도 절대 티를 내지 않고 조용히 선물만 건넨다. 윤 과장은 "부서원들로부터 호감을 사는 일은 어려운 게 아니라 귀찮을 뿐"이라며 "인사 이동 후 한 달 정도만 귀찮음을 감수하면 모든 직원들이 내 편이 된다"고 말했다.

정인설/이관우/이정호/김동윤/이고운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