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나 어릴 적,명절 다가오는 게 반갑지 않으면 어른이 되는 거라는 엄마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설이 설레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명절이 기다려지지 않는 게 어른의 세계라면 어른 같은 건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른들께 세배를 하고 세뱃돈을 받을 때의 그 벅찬 감동을,용돈을 받는 요즘 아이들은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늘 언니들의 낡은 옷을 물려 입던 시절,어여쁜 설빔을 기대하며 손꼽아 기다리던 설날은 어쩜 그리 더디 오던지.새옷을 차려 입고 널을 뛰거나 윷놀이를 하다 보면 짧은 겨울의 하루는 어느 새 후딱 지나가 버렸다. 아름답고도 안타까운 꿈처럼.

세뱃돈도 설빔도 크나큰 기쁨이었지만 그래도 설을 기다리는 마음 중 가장 큰 것은 세시(歲時) 음식에 대한 기대였다. 엄마는 식혜,강정,유과를 집에서 직접 만들었고 대소쿠리에 넘치도록 종일 전을 부쳤다. 절절 끓는 아랫목에 파묻어놓은 식혜단지에선 수상쩍은 단내가 솔솔 풍겨 나왔다. 차례 지낼 음식을 담아 놓기 전에는 함부로 음식에 손을 댈 수 없었지만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가장 분주한 건 엄마였지만 나 역시 주방 보조로서 덩달아 바빠졌다. 고사리손으로 전감에 밀가루를 묻히거나,유과에 쓸 쌀튀밥을 잘게 부수어야 했다. 그 중에서도 설 준비의 절정은 방앗간 나들이였다. 밤새 불린 쌀을 이고 가는 엄마의 치마꼬리를 쥐고 따라가면 긴 줄 끝에 함지를 내려놓은 엄마는 그걸 잘 지키라고 이르고는 바삐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추운 날씨에 발은 시려오고 소맷부리로 콧물을 닦아가며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지만 방앗간 풍경은 어찌나 신기하던지.

순서가 되면 방앗간 아저씨는 우리 쌀을 기계에 부었고 아래쪽으로 눈처럼 흰 가루가 펄펄 쏟아져 나왔다. 쌀가루를 앉힌 양철 찜솥에서는 뜨거운 증기가 푹푹 나와 골목까지 퍼졌고 아저씨는 피댓줄 조심하라고 큰소리를 쳐댔다. 명절 무렵이면 돌아가는 피댓줄에 걸려 팔다리를 다친 사람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떠돌았지만 피댓줄에 대한 두려움도 떡에 대한 열망을 잠재우기엔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찜솥을 내려서 떡판 위에 탁 쏟으면 맹렬하게 김을 뿜는 희디 흰 설기가 드러났다. 이제야말로 매끈한 가래떡이 끝없이 나올 터였다. 나는 비로소 흰 설기 한쪽을 뜯어서 입에 넣었다. 오래도록 내게 설날은,그 지독히 뜨겁고 폭신한 설기의 맛으로 기억되었다.

이제 가래떡을 직접 뽑거나 손이 많이 가는 세시음식을 만드는 가정은 점점 없어진다. 사먹는 게 더 싸게 먹히는데 노력과 시간을 들이는 건 어리석은 건지도 모른다. 자본 중심의 가치관 속에서 세시 풍속은 빠르게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사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형식과 내용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어서,사라져버리는 건 세시음식만은 아닌 것 같다. 꼽아보면 행복한 추억은 미각과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설의 추억에 관한 한 요즘 아이들은 나 어릴 적에 비해 아주 가난해진 셈이다. 어린 시절 설날의 행복감이란 어쩌면 쌀강정이나 떡보다는,추운 바깥에서 돌아와 문을 열었을 때 집안에서 밀려나오던 고소한 기름내와 달큼한 엿내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그나저나 엄마인들 설날이 싫었을까. 허리가 휘는 노동이 무서웠을 테지.전을 부치고 식혜라도 할라치면 나도 오늘은 늦도록 동당거려야 할 것이다. 연휴를 맞은 남정네들도,국제선 일등석에 앉아 기내식 서비스 받듯 호강할 생각을 접고 부엌을 기웃거려 보자.동태살에 밀가루도 묻히고 멸치라도 다듬다보면 아내들의 명절무섬증이 한결 나아질 터이니.그리하여 모두에게 복된 설날이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