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칫 정쟁에 휘말릴까봐 대놓고 말도 못해요. 지난 한 달 동안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간 느낌이에요. "

연초 세종시에 투자를 결정한 A사 관계자 B씨는 기자를 만나 기업 투자업무에 필요한 로드맵을 상세하게 설명하며 답답한 속내를 털어놨다. 사업 타당성을 본격 검토하기 전에 '부지 정밀실사→인프라 점검→관련 인력 충원→법률 · 회계 자문→건설계약 및 IT 시스템 발주→고용계획 수립' 등 준비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밀려있지만 날선 정치권의 공방만 지켜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B씨는 "우리를 더욱 황당하게 하는 것은 특혜 논란"이라며 "한쪽에선 투자 확대와 고용 창출을 압박하면서 다른 쪽에선 기업을 정쟁의 도구로 활용하는 게 한국의 정치"라고 넌덜머리를 냈다.

◆대체 후보지 물색

자칫 투자시기를 놓쳤다간 향후 글로벌 시장 선점은 고사하고 아예 경쟁무대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 세종시 입주를 기다리고 있는 기업들의 공통된 위기의식이다. 실제 삼성이 세종시에서 펼치기로 한 그린 에너지와 헬스케어 사업은 전 세계 모든 전자회사들이 미래 수종사업으로 키우기 위해 속속 투자대열에 합류하고 있는 분야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김순택 부회장이 오죽했으면 폭설을 뚫고 세종시를 찾았겠느냐"며 "경쟁사들은 펄펄 뛰어다니는데 우리만 발목이 묶여 있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웅진은 세종시 공장 착공이 내년 후반기로 예정돼 있어 다소 느긋한 편이다. 하지만 세종시 수정안이 통과되지 않을 경우 미련없이 다른 지역을 알아보겠다는 입장이다. 한화 역시 연내 국방과학연구소 착공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서면 세종시 투자를 전면 재검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일부 기업 실무진들은 해외를 포함해 다른 사업 후보지를 물색하는 작업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래 성장동력 발굴을 가망없는 정치권의 자율 조정에만 맡겨둘 수는 없다는 판단에서다. 기자와 만난 B씨는 "아무리 상황이 나빠져도 해외로 나가서는 안된다는 게 경영진의 판단"이라면서도 "하지만 이런 식으로 세월만 보내고 있을 수는 없는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뭘 좀 알고 얘기하라"

기업들은 특혜 논란에 대해선 격앙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우선 '평당 40만원에 원형지를 공급하는 것은 특혜'라는 국회 일각의 지적에 대해 "원형지 개념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원형지는 도로 등 기반시설만 제공하고 부지조성 공사는 하지 않는 미개발지를 일컫는다. 따라서 실제 토지분양가는 원형지 가격에 부지조성 가격을 합쳐야 하며,세종시 부지의 경우 최종 가격은 평당 80만원대라는 것이 기업들의 설명이다. 한화 관계자는 "평당 80만원 선이면 인근의 아산테크노 밸리나 제4산업단지와 비슷한 수준"이라며 "세제 지원 역시 기업도시와 같은 수준"이라고 말했다.

'실제 분양가가 평당 80만원이라고 해도 세종시 조성원가가 평당 227만원이기 때문에 저가로 공급받는 것 아니냐'는 공박에 대해서도 기업들은 정치권의 무지(無知)를 힐난한다. 토지용도별 차등매각 구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엉뚱한 논리를 펴고 있다는 것이다. 한 건설회사 임원은 "산업단지는 기업과 인구를 유치해야 주택 상업용지를 팔 수 있기 때문에 산업용지는 조성원가보다 싸게 매각하는 게 기본"이라며 "세종시도 주택용지는 평당 300만~400만원,상업용지는 평당 1000만원 정도를 받아 조성원가를 보전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기업들은 보다 근본적으로 인도 베트남 중국 미국 등이 해외기업을 유치할 때 제공하는 인센티브 수준을 감안하면 세종시 입주기업들에 대한 특혜 논란은 시대착오적이라는 입장이다. 이들 나라는 삼성전자 하이닉스 기아자동차 LS전선 등의 생산시설을 유치하면서 부지 무상임대나 저가 지원,세제 및 보조금 지원,파업금지 구역 지정 등 다양한 혜택을 제공했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