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름한 차림의 한 젊은 남자가 자전거를 고치고 있다. 그는 우아한 저택의 여주인인 여배우 에스메(윤소정 분)의 외동딸 에이미(서은경 분)의 남자친구 도미닉(김영민 분)이다. 직업도 변변치 않다. 게다가 소중한 딸 에이미는 도미닉에게 버림받을까 두려워 임신 사실을 숨기고 있다. 고상하고 오만한 에스메의 눈에 찰 리가 없다. 결국 에스메는 시비를 걸고야 만다. "프리랜서 수리공이니?"

영국 작가 데이비드 해어의 원작으로 국내 초연된 연극 '에이미'(연출 최용훈)에서 에스메와 도미닉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고,개와 고양이처럼 으르렁댄다. 겉으로는 흔하디 흔한 고부갈등의 장모 · 사위 버전이다. 그러나 에스메와 도미닉의 반목은 거대한 흐름의 은유이기에 '에이미'는 강렬한 주제의식을 감춘 작품으로 승화된다.

에스메와 도미닉은 상반된 가치를 반영한다. 표면적인 차이는 연극과 영상이다. 연극배우라는 자부심에 충만한 에스메는 "TV? 하고 싶지 않아"라며 영상을 깔본다.

반면 TV미디어에서 거물이 된 도미닉은 장모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면서 "주제는 '연극의 종말'입니다"라고 카운터펀치를 날린다.

이외에도 극에는 구세대인 에스메와 신세대인 도미닉의 갈등 요소가 촘촘하게 배치돼 있다. 에스메는 순수예술의 추종자이며 보수적인 가치의 수호자다. 도미닉은 대중의 취향을 중시하며 혁신을 추구한다. 격변기에 다른 세대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갈등이다.

세월은 도미닉의 편이었다. 성급한 결정으로 투자에 실패한 에스메는 그토록 경멸하던 TV의 '쓰레기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해 연명하는 처지가 된다. 그러나 도미닉은 미디어재벌로 승승장구한다. 두 사람을 중재하려 애쓰던 에이미는 지쳐버렸다. 그렇게 2년,영국 웨스트엔드의 작은 극장에서 공연하는 에스메 앞에 도미닉이 나타난다.

한 사회에서 정반대의 가치는 공존하기 어렵다. 보수가 득세하면 진보가 고개를 숙이고,평등을 이루면 자유가 침해된다. 그게 세상의 이치다. 하지만 '에이미'는 다른 상대를 포용하고 끌어안을 수 있는 유일한 힘,사랑을 이야기한다.

묵직한 주제를 형상화하는 데에는 모든 배우의 호연이 큰 역할을 했다. 에스메 역을 맡은 윤소정씨를 비롯해 출연진의 탁월한 연기가 돋보인다. 21일까지 서울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2만5000원.(02)3673-5580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