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기업에 다니는 김모 대리(34)는 지난달 말 연봉협상을 마쳤다. 연봉협상을 하던 날 회의실에 들어갔더니 사장이 대뜸 "얼마나 오르기를 희망하느냐"고 물어왔다. 순간 당황했지만,전날 인터넷 카페에서 연봉협상의 기본자세로 꼽았던 '베팅은 강하게,눈빛은 공손하되 흔들림 없이'를 떠올렸다. "10%는 올려 주셨으면 한다"고 공손히 답했다. 사장은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너무 세게 불렀나'는 후회가 밀려왔다. 슬그머니 "한 자릿수 인상도 괜찮다"고 꼬리를 내리려는 찰나,사장이 선뜻 '오케이'를 외쳤다.

김 대리는 의기양양해서 회의실을 나섰다. 대리가 된 뒤 첫 연봉협상에서 10%가 올랐으니 괜찮은 협상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팀장은 '허허' 웃었다. 팀장은 "대리 초년차에게 연봉을 가장 많이 올려주는 게 회사의 관례"라며 "회사에서는 15%가량 인상을 준비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하지만 어쩌랴.버스는 이미 떠난 것을.연봉제가 확산되면서 상당수 기업들이 2월부터 약 한 달간 연봉협상을 진행한다. 물론 삼성 현대차그룹 등은 간부 사원에 대해 연봉제를 실시하지만 별도의 협상 테이블을 갖진 않는다. 그렇지만 연봉 책정에 동의하는 절차를 거쳐야 하는만큼 직장인들에게도 '스토브 리그'가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연봉 협상? 연봉 통보!

국내 기업들이 연봉제를 도입한 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제대로 된 연봉협상이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오히려 '연봉 협상'이 아닌 '연봉 통보'로 불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일단 앉아보라며 "분위기 잘 알 거야,짜증나지만 좀 받아들이라"는 식의 읍소형도 상당하다. 그런가 하면 "그래도 많이 올린 협상안"이라며 잔뜩 생색을 내지만,말 그대로 '성의표시'에 그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대기업에 다니는 박모 과장(38)은 "막상 연봉협상안에 사인을 한 뒤에는 회식자리나 회의 시간만 되면 올려준 금액이 대단한 것처럼 생색내며 과도한 업무를 시키는 경우가 많다"며 "이렇게 생색을 당할 줄 알았으면 차라리 동결하고 편하게 일하는 게 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고 씁쓸해 했다.

연봉협상에 서툰 직장인들은 노회한 경영진들의 연봉협상 기술에 당하기도 한다. 원자재 유통업체에 다니는 이모 대리(34)는 최근 연봉협상을 위해 사장실에 들어갔다가 홀린 듯이 빠져나왔다. 이 대리의 연봉협상안은 '15% 인상'이었다. 그런데 사장은 "요즘 직장생활이 어떠냐","부서 분위기는 좋냐" 등 일상적인 대화만 이어갔다. 30분쯤 지나자 비서가 들어와 "사장님 다음 일정이 있으시다"며 이 대리에게 자리를 뜰 것을 권유했다. 이 대리는 나중에 부서장을 통해 "올해 연봉을 5% 인상해 주겠다"는 통보만 받았다. 이 대리는 "연봉협상을 하자고 불러서 엉뚱한 얘기만 해서 보낸 뒤 일방 통보하는 회사의 수법을 몰랐다"며 후회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능력보다 시장 상황 때문에

다음 달 회사를 옮기기로 결정한 증권회사의 박 대리(32).현재 회사의 리서치센터에서 5년 간 일하다 고액의 연봉을 약속받고 이직할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박 대리는 시장 상황 때문에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 박 대리를 영입하려는 회사 측에서 갑자기 "연봉 계약서를 다시 쓰자"고 제의를 해왔기 때문이다. 유럽발 금융위기 가능성 때문에 분위기가 다시 얼어붙은 탓이었다. 박 대리를 영입키로 한 회사는 원래 주기로 했던 이적료를 조금 깎고 성과에 따라 추가 성과급을 주는 방향으로 계약 내용을 변경하기를 원했다. 결과적으로 이적료 5000만원이 날아갈 상황에 처해 박 대리는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외부 환경은 연봉협상 때마다 박 대리의 발목을 잡았다. 작년에는 미국발 금융위기 때문에 이직을 꿈꾸지 못했다. 박 대리는 "증권맨들이 가장 많이 연봉협상을 하는 2~3월마다 시장 상황이 급변해 능력보다 '보이지 않는 손'이 연봉을 결정하고 있다"며 씁쓸해 했다.

◆차라리 계약직으로 갈아탈까

'실적이 있는 곳에 성과가 있다'는 것이 연봉제의 기본 취지다. 그러나 이런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아 회의를 품는 직장인들도 적지 않다. 보험영업 실적으로 따지면 사내 전체 100개 가까운 영업소에서 5등 밖으로 밀려나 본 적이 없는 보험회사의 오모 과장(36).주니어 시절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대리 시절 최연소 소장 타이틀을 달아 승승장구하고 있다. 작년에도 전체에서 5등 안에 들어 최고 등급인 'S등급'이 확실시된다.

그렇지만 별로 기쁘지 않다. 자기 앞으로 떨어지는 인센티브가 그리 많지 않아서다. 오 과장이 올해 S등급을 받는다고 해도 추가로 받는 성과급은 500만원가량에 불과하다. 회사에서 실적이 우수한 영업소에 추가로 주는 인센티브 중에서 영업소 운영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오 과장은 "성과에 따라 연봉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에 연봉협상에 별 관심이 없다"며 "일하는 만큼 돈을 받기 위해 차라리 계약직으로 전환하거나 외국계 회사로 옮길까 생각하고 있다"고 전했다.

◆연봉협상의 비밀병기 '이직'

연봉협상에서 김 과장,이 대리들은 '약자'일 수밖에 없다. 협상 상대방인 회사 인사팀 담당자들은 수년째 연봉협상 테이블에서 닳고 닳은 베테랑 '협상 전략가'들이다. 또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팀장급,임원급과 달리 김 과장과 이 대리들은 대부분 '대체 가능한 인력'인 경우가 많다. 서른 중반 정도 넘어가면 회사를 옮기기도 마땅치 않다.

이런 제약 속에서도 협상 기술을 어떻게 구사하느냐에 따라 연봉 인상폭이 소폭이나마 달라지기도 한다. 회사의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것도 연봉협상 때 은근한 힘이 된다. 국내 중소 제약회사에 다니는 배모 과장(39)이 딱 그런 케이스다. 그는 원래 대학졸업 후 회계사 준비를 오래 하다 뒤늦게 취직에 성공했다. 오랫동안 회계공부를 한 덕분에 '숫자의 달인'이라 불릴 만큼 재무와 세무 등에 밝다보니 회사 돌아가는 사정을 구석구석 꿰고 있다. 배 과장은 현재 회사로 옮긴 지 3년밖에 안됐지만 연봉은 40%나 뛰었다.

연봉협상 때 최고의 카드는 '이직 제의를 받았다'는 말을 슬쩍 흘리는 것이다. 리스크가 높은 대신 효과도 즉각적이다. 하지만 잘못 쓰면 되레 스스로 직장을 걷어차는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외국계 로펌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는 박모씨(33)가 그런 사례다.

그는 작년 중순 고용계약 갱신 과정에서 에둘러서 "최근 실적이 좋았고 리더십도 인정받고 있으니 금전적 보상을 더 받았으면 한다"고 요청했다. "주변 로펌에서 이직제의를 받았지만 이 회사에서 더 일하고 싶다"는 말도 넌지시 끼워넣었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불황을 빌미로 회사가 한 달 뒤 전 세계 직원의 10%를 줄이기로 했다는 것을.계약 갱신에 실패한 그는 결국 더 낮은 연봉을 받고 다른 회사로 옮겨야 했다.

김동윤/이관우/이정호/정인설/이상은/이고운 기자 oasis9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