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중을 염두에 둔 역사 관련서들은 두 가지 뚜렷한 경향을 띠고 있다. 하나는 이른바 잡학상식류다. 《우리가 몰랐던 OOO》 《OO 속살 들여다보기》 같은 제목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런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데는 《조선왕조실록》 같은 방대한 전적들이 디지털화하고 인터넷에 공개된 덕분에 키워드 몇 개로 손쉽게 원하는 내용들을 추출할 수 있는 배경이 자리잡고 있다.

또 하나는 《OO역사 명장면》 계열이다. 이웃 일본에서는 NHK 다큐멘터리 '그때 역사가 움직였다'가 큰 인기를 모으면서 같은 제목의 책과 만화까지 베스트셀러가 됐다. 인기의 비결은 사람들이 익히 아는 유명한 역사 장면을 드라마처럼 구성해낸 재미에 있다. 역사의 맥락을 무시하고 10개 또는 50개씩 단편을 취사하는 무모함(?)이 허용되는 것은 역시 이 시대의 경박단소(輕薄短小) 성향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이 세상 어디에 살든 우리 모두는 아프리카인이다. 이는 인간에 가장 가까운 침팬지와 고릴라가 아프리카에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600만년 전 침팬지로 발전해간 혈통과 현생 인류로 발전해가는 혈통이 분리된 곳이 바로 아프리카였다. …다만 확실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5만년 전 사바나라고 불리는 아프리카 동부 대초원 지대에 현재의 인류와 매우 흡사한 인간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

이렇게 시작하는 《인류의 역사(The Story of Man)》는 현대에 이르는 세계문명의 역사를 모두 45개 장으로 나누어 이야기한다. '문명의 패러다임을 바꾼 결정적 순간'이라는 부제 때문에 45개의 '장면'인가 속단했다가도 '로마제국의 흥망' '혁명의 시대' '오만한 미국' 같은 차례의 제목을 보면 '순간'이 아니라 '시대'를 그린,호흡이 긴 역사 이야기임을 알게 된다.

이 책은 인류가 이 시점까지 생존할 수 있었던 물적 토대를 정주농업과 산업혁명 두 가지에서 찾는다. 그러나 근대 유럽의 세계 지배를 뒷받침한 산업혁명은 순리적으로 당연히 이뤄져야 할 것이 마침내 이뤄진 결과가 아니라 수많은 행운의 변수들이 뒤섞이면서 태동했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역사가 되지 않는다. 저자는 지난 100년간 인류가 겪어야 했던 산업혁명의 부작용,식민지 쟁탈전,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전후의 빈부 격차 확대에 주목하면서 이제 인류는 이런 '인위적 잘못들'의 반복을 막아야 할 운명의 전환점에 서 있다고 말한다. 어떻게 막을 것인가?

"우리는 지난 100년간의 일들을 거울 삼아 문명이 지속적으로 진보할 것이라는 환상을 버리는 것이 옳다. 역사는 찬란한 미래가 보장된 진보라는 식의 선형적 관점과 달리 오랜 주기를 두고 비슷한 사건들이 되풀이되는,종착지가 없는 순환적 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 역사는 운전능력이 천차만별인 사람들이 만취 상태로 어둠 속을 운전하는 것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

결국 '역사는 우리편'이라는 독선과 망집을 버리고 모두가 함께 누리는 역사를 만드는 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아프리카인'이니까. 저자는 2004년 국내에 번역된 《찰스 다윈》으로 잘 알려진 대중적 저술가다.

우종근 편집위원 rgbac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