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 아웃 만루에 들어선 타자가 있다.

볼카운트는 투 스트라이크 노 볼. 제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타자라도 이쯤 되면 흔들리기 마련이다.

볼을 골라내기도 어려울 뿐더러 파울볼로 커트해내기도 쉽지 않다.

적시타를 때려 영웅이 되느냐, 범타로 물러나 '루저'(패배자)가 되느냐, 공 하나에 모든 게 달렸다.

'국민타자' 이승엽(34.요미우리 자이언츠)이 지금 딱 그런 상황에 부닥쳐 있다.

일본프로야구 요미우리와 4년 계약 만료를 앞둔 이승엽은 지난 2년간 성적이 저조했던 탓에 올해는 당장 주전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때에 따라서는 스프링캠프, 시범경기에서 큰 활약을 보이지 못하면 2군에서 시즌을 시작할 수 있는 다급한 상태이기도 하다.

야구 인생 최악의 위기를 맞았지만 이승엽은 "도리어 부담감을 떨쳐 얼굴이 한창 야구를 잘했을 때 모습으로 돌아왔다"며 웃었다.

배수진을 친 장수처럼 이제는 운명에 맡긴다는 듯, 이승엽의 표정은 편안해보였다.

이승엽이 매해 겨울, 구슬땀을 흘리는 대구 세진헬스를 9일 찾았다.

올해는 복근 근육 강화에 초점을 맞춰 이승엽은 바벨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현재 본인이 처한 상황을 야구로 풀어본다면.
▲주자 만루에 볼카운트 2-0. 굉장히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올해 (야구 인생의) 모든 승부가 걸린 것과 공 하나에 운명이 걸린 게 비슷하다.

절박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최악이다.

지난 2년간 개막전에는 나갔지만 지금은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 상황이다.

스프링캠프와 시범경기 성적에 따라 상황이 바뀔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시기다.

--지난해 귀국 후 올해 못하면 '팀에서 알아서 하겠지', '팀에서 자르겠지' 등의 표현을 했다.

많이 약해진 느낌이 든다.

▲약해진 것보다 그만큼 잘해야겠다는 부담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냐는 생각을 했다.

대충은 아니었지만 지난해까지는 요미우리와 계약이 남았으니 '내 할 일만 하면 된다', '올해 못하면 내년에 잘하면 되지'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겉으로는 걱정을 많이 했지만 속으로는 계약기간 남았던 탓에 '정말 끝'이라는 생각은 약했던 것 같다.

올 한해가 야구 인생의 최대 위기인 만큼 지난 3년과는 생각을 달리해야 할 것 같다.

--'요미우리가 아닌 다른 팀이라면 잘할 수 있을 텐데'라는 견해를 가진 팬들이 많다.

▲요미우리는 아시다시피 선수층이 워낙 두껍고 실패는 용납이 안 된다.

모든 게 성적에 달렸다.

야구를 잘하면 정말 너무나 행복한 곳이지만 못하면 어느 곳보다 냉정한 곳이 요미우리다.

내가 최근 몇 년간 좋은 성적을 냈다면 팬들도 그런 생각은 안 했을 것이다.

--해마다 요미우리는 새로운 외국인 선수를 데려오는 등 이승엽을 압박하고 있다.

하라 다쓰노리 감독의 믿음도 변한 것 같은데.
▲당연히 변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성적이 좋아야 한다.

2년 연속 개막전에 출전하면서 감독이 기회를 줬는데 난 이를 살리지 못했고 초반에 성적이 떨어지다 보니 자신감을 잃었다.

위기가 갑작스럽게 찾아와 나 또한 당황했다.

육체적인 것보다 고민을 많이 해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작년에는 시범 경기 때 워낙 좋다가 시즌 초반 급전직하했다.

▲타격감이 너무 좋았다.

속으로는 '내가 일본야구를 평정할 수 있겠구나'라는 자신감이 들 정도였다.

한 경기에서 홈런 2방을 때린 날은 코치에게 일부러 바꿔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상대 투수에게 모든 걸 다 보여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의욕이 너무 앞섰던 탓인지 정작 시즌 시작하자마자 밸런스가 무너졌고 그대로 내리막을 탔다.

--2번 또는 8번을 때리기도 했다.

▲벤치에 앉아 있다가 2번 또는 8번 타순에 들어서라고 할 때는 놀랐다가 보다는 '아!'하는 탄식만 나왔다.

뭔가 깊은 상념에 잠긴다는 기분?
8번은 2004~2005년 지바 롯데에서 한 두 번 때려봤다.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

--성적이 좋지 않자 구단 또는 코치로부터 심한 얘기도 들었나.

▲한 번씩 (가슴에) '꽂히는' 말을 들을 때마다 속이 상했다.

요미우리에서는 수비할 때 항상 코치의 지시에 따라 시프트가 이뤄진다.

그러나 어쩌다 내가 1루 선상을 비워두고 수비를 하다 그쪽으로 안타가 나오는 바람에 경기를 진 적이 있었다.

그러자 코치가 '프로라면 그 정도는 알아서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통역을 통해 면박을 주기도 했다.

30타수 이상 안타를 때려내지 못했던 어느 경기에서는 1회 한 타석만 보고 나를 바꿨다.

바뀐 이유는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내가 잘 알고 있건만 코치가 다가와 '왜 바뀐 줄 아느냐'고 묻더라.
그런 것을 보면서 요미우리에서 많은 걸 배운다.

나중에 지도자가 되면 상처가 되는 말은 안 해야지, 희망을 주는 얘기를 해야지 등이다.

내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도 많이 바뀌었다.

좀 냉정해졌다고 할까.

--위기를 뚫는 돌파구로 '즐기면서 야구 하겠다'고 말했다.

▲실제 지금은 많이 편해졌다.

작년 11월에 귀국할 때만 해도 너무 표정이 어두워 가족이나 친구들이 걱정을 많이 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분명히 있지만 '내가 못하면 구단에서 그만두라고 할 것이다.

그만두면 당연히 비참하겠지만 (요미우리에서 패배를) 그냥 인정하겠다.

안되면 다른 길을 찾아야지'하는 생각을 하니 의외로 마음이 편해졌다.

계약기간이 남았을 때는 올해 못한 걸 내년에 잘해야겠다는 부담이 앞섰지만 올해는 그런 게 없다.

압박에서 벗어나니 야구를 잘할 때 얼굴로 돌아온 것 같다.

이번 오프 시즌은 몸과 마음이 잘 준비된 것 같아 만족스럽다.

--내년에는 무려 5명의 한국 선수가 일본 무대에서 활약한다.

▲일본에서 벌써 7년째에 접어든다.

김태균(지바 롯데) 이범호(소프트뱅크) 같은 후배들은 이제 막 일본야구에 적응하는 시기인데 그들보다는 좋은 모습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적어도 게임을 하다 빠지거나 대타로 바뀌거나 그런 약한 모습은 보여주기 싫다.

열심히 준비해서 모범이 되고 싶고 '승엽이형 아직 괜찮구나', '승엽이형이 안 본 사이 많이 성숙해졌구나'라는 인상을 남기고 싶다.

(대구연합뉴스) 장현구 기자 cany9900@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