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가리켜 은둔국이라고 호도한 것은 언필칭 무지의 소치다. "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은 《문명담론과 문명교류》에서 이렇게 단언한다. 미국인 목사 윌리엄 엘리엇 그리피스가 1882년에 《은둔의 나라 한국》을 쓴 이래 '은둔'이 마치 한국인의 체질인 양 알고 있지만 한국의 역사와 문화는 오래 전부터 세계를 향해 열려 있었다는 것이다.

증거는 많다. 1965년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드 북쪽에 있는 아프라시압 궁전터에서 7세기 후반의 사마르칸드 왕을 알현하는 12명의 외국 사절단 행렬이 그려진 벽화가 발견됐다.

행렬의 끝에는 새의 깃을 꽂은 조우관(鳥羽冠)을 쓴 두 사람이 서 있는데 이들이 한반도 국가의 사절이라는 데 학계의 견해가 일치한다. 검은 머리카락에 밝은 갈색 얼굴,상투머리에 쓴 모자와 조우관 등이 이를 말해준다.

경주에서 발굴된 각종 유리제품과 '미소짓는 상감옥' 목걸이,계림로단검(短劍) 등은 로마문화가 신라에 스며들었던 증거다. 서양인들보다 700~800년 앞선 시기에 아랍 무슬림들은 신라를 이상향의 하나로 선망하면서 내왕하고 교역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교역과 교류는 결국 서로 다른 문명 간의 교류를 낳았고,문명교류의 현장에는 문화와 경제가 함께 움직였다. 더 나은 물품을 만드는 기술을 가진 민족과 국가는 교류의 과정에서 경제적 · 문화적 번영을 누렸던 것이다.

그래서 정 소장은 "21세기는 문명교류의 무한 확산 시대로서 문명담론이 시대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며 문명만이 인류가 지향하는 공생공영의 미래를 열 수 있다는 문명대안론을 제시한다. 아울러 "문명과 문명교류에 대한 연구가 절박한 시대적 요청"이라고 강조한다.

《문명담론과 문명교류》는 이런 시대적 요청에 응답하기 위한 책이다. 책은 크게 문명담론과 문명교류의 두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1부 '문명담론'에서는 문명진화론 · 문명이동론 · 문명순환론과 같은 근대적 담론과 문명충돌론 · 문명공존론 · 문명교류론 등의 현대적 담론을 역사적으로 살피면서 한국 속에 새겨진 세계문명의 흔적을 짚는다.

2부 '문명교류'에서는 실크로드를 통한 교류 과정을 구체적으로 조명한다. 고구려와 서역의 교류,혜초의 서역기행,고선지의 석국(타슈켄트) 원정,제지술의 전파 경로인 '페이퍼 로드'와 '도자의 길'이라고 불린 해양 실크로드,한국과 페르시아 간 문명교류 등을 다각도로 설명하고 있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