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국내의 한 중소 조명회사가 중동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의 국방업무를 총괄하는 왕세자 VIP룸에 고급 조명기구인 샹들리에 600만달러어치를 공급하는 계약을 맺어 화제가 됐다. 이번 수주 건은 세계 고급 조명의 대명사 격인 프레시오(Precio) 등 유럽 최고급 브랜드를 제치고 따내 한국의 조명산업 위상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서울 성수동에 본사를 둔 삼진조명(대표 최혁재 · 34)이 주인공이다. 이 회사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조명회사이자 거의 유일하게 중동지역 왕실에 조명을 납품하고 있다. 지금은 주로 고가의 샹들리에 등 장식용 고급 조명을 제작해 호텔,예식장,고급 빌라 등에 설치하거나 수출하고 있다.

삼진조명은 1966년 서울 종로 세운상가에 15평 규모의 사무실을 임차,'삼진전기공업사'로 출발했다. 최창한 회장(70)은 "당시는 국내 경제 상황이 매우 열악했다"며 "군에서 제대한 후 잠시 다른 일을 하다가 주변에서 조명 분야가 유망할 것이라는 권유를 받은 데다 발전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해 사업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28세이던 최 회장은 어머니와 남동생(창준) 등 셋이서 살던 서울 중곡동 집을 팔아 사업자금을 마련했다. 최 회장은 나름대로 손재주가 있어 직원 7명과 함께 조명기구를 직접 제작,국내 매장에 주로 공급했다. 2년 정도 지나 사업이 자리를 잡으면서 자체적으로 디자인해 내놓은 장식용 조명인 샹들리에는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최 회장은 "제품을 일일이 손으로 만들다보니 품이 많이 들었다"며 "밀려드는 주문을 소화하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이런 가운데 1970년대 들어 아파트 건설 붐이 일면서 회사도 성장세를 타고 건설회사를 상대로 대규모 납품도 했다. 주로 호텔 등에 쓰이는 고가의 클래식풍 샹들리에 분야에 주력했다.

최 회장은 "1970~80년대 서울 프라자호텔,부산 국제관광호텔 등 국내 호텔의 40% 정도에 조명을 납품할 정도였다"며 "서울 서부이촌동 왕실아파트(1970년),여의도 삼익아파트(71년),국회의사당(76년),세종문화회관(77년) 등이 대표적인 납품처였다"고 말했다.

삼진조명은 당시 정부가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펼칠 때여서 수출에도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1978년 서울 프라자호텔 조명공사를 끝냈을 때였습니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왕족이자 건설업체 관계자 2명이 이 호텔에 묵었는데 22층 연회장의 대형 샹들리에를 보고 '누가 만들었냐'며 제작업체를 찾았습니다. "

조선호텔에서 바이어를 만나고 있던 최 회장은 호텔 측으로부터 전화를 받자마자 달려갔다. 그는 "건설업체 관계자로부터 사우디 왕족이 제다에 궁전(TAIPE)을 짓고 있는데 샹들리에를 비롯해 조명을 공급해달라는 요청을 받아 납품(120만달러)하게 됐다"며 "알고 보니 이 궁전은 당시 사우디 국방장관(3대 사우디 국왕)이 사용하는 건물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때 공급한 샹들리에는 모두 150여개로 무게만 28t에 달했다. 그는 "당시 국내에서 화물 전세기 마련이 여의치 않아 사우디 건설업체가 직접 요르단 화물기를 보내 제품을 싣고 갔다"고 일화를 소개했다.

이 수주 건으로 삼진은 당시 상공부로부터 100만달러 이상 수출업체에 주는 박정희 대통령이 쓴 '무역입국(貿易立國)'이라는 휘호를 받기도 했다.

최 회장은 "클래식 조명은 화려하면서도 가볍지 않고,무거우면서도 차갑지 않고,따뜻하면서도 사랑스럽고 우아한 매력이 장점"이라고 예찬했다. 특히 중동 왕실은 클래식하고 화려한 조명을 선호하는데 삼진이 만든 제품이 그들을 유혹하는 데 큰 힘이 됐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삼진이 만드는 샹들리에(가로 2.5m×높이 1m)는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이 5300개 들어가며 수작업을 하다보니 제작기간이 2~3주 정도 걸린다.

이를 계기로 삼진조명은 중동을 비롯해 미국 캐나다 호주 중국 싱가포르 괌 등으로 잇달아 수출에 나섰다.

이런 가운데 1980년대 후반 대만이 미국 등에 대한 수출을 강화하면서 시장 상황이 여의치 않아 1990년부터 내수에 치중하기 시작했다. 이때 제주도 라마다호텔 카지노,밀레니엄 힐튼호텔 세븐럭 카지노,목동 하이페리온,제주 라헨느 리조트 클럽하우스 등 다양한 건물의 납품을 따냈다. 회사 규모는 초기에 비해 10배 이상 커졌다.

최 회장은 사업이 커지자 2003년 직장에 다니던 막내이자 외아들인 최 대표(대리로 입사)를 불러들였다. 최 대표는 "제조업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어서 처음에 선뜻 내키지 않았지만 아버지 연세도 있고 잘 키워놓은 사업을 포기하기가 아까워 가업을 잇게 됐다"고 말했다.

삼진조명은 국내 조명 시장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2007년부터 다시 중동 등 해외 시장 개척에 나섰다. 최 회장은 "국내 건설업체들이 해외에서 잇단 공사를 따내듯이 우리도 충분히 경쟁에서 이겨낼 수 있다"며 자신감을 나타냈다. 최 회장은 이를 위해 중동에 지사를 설립하고 큰딸(원영 · 미국 현지법인 운영)의 남편인 김의재씨를 지사장으로 발령냈다. 이 같은 노력의 결과로 최근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왕세자 집무실(600만달러),아부다비 족장국가인 샤자 왕족 별장(50만달러) 조명공사를 따냈으며 아부다비 7성급 호텔인 JW메리어트호텔(700만달러)도 거의 성사 단계에 있다.

최 회장은 자식들도 조명을 보면서 자라 미적 안목이 있다며 가족들에게 회사 업무를 맡기고 있다. 둘째딸(문선)은 서울 논현동 전시장총괄 과장,셋째딸(문희)은 생산부총괄 과장을 담당하고 있다. 최 회장은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유명 장수기업은 대부분 가족경영으로 가업을 잇고 있다"며 "삼진조명을 한국의 대표적인 가족회사로 키워보겠다"고 말했다.

김후진 기자 j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