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말 시작된 퇴직연금 제도가 내달 1일이면 시행 네 돌을 맞는다. 당초 폭발적인 성장세를 기대했던 것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퇴직연금 시장은 어느덧 9조원대로 성장하며 꾸준히 규모를 키워가고 있다. 2007년 말 2조원대를 넘어선 이후 시장 확대에 부쩍 속도가 붙고 있는 추세다.

이에 따라 은행 증권 보험 등 금융사들은 중장기적으로 자산관리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퇴직연금 공략이 필수라는 판단 아래 영업력을 집중하고 있다. 특히 이맘때는 퇴직연금 도입을 추진 중인 기업들이 해를 넘기기 전에 사업자 선정을 서두르는 시기여서 금융사들의 자존심을 건 진검승부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신설 기업의 퇴직연금 가입을 의무화하는 내용의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안이 내년에 국회를 통과하면 시장이 더욱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퇴직연금 시장이 확대되면 안정적인 장기자금이 증시로 대거 유입되는 효과도 있어 증시 수급에도 크게 기여할 전망이다.

◆은행 증권 보험 간 치열한 3파전

11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퇴직연금 적립액은 지난 9월 말 기준으로 9조1047억원에 달한다. 도입 1년여 만인 2006년 말 7000억원대에 불과했던 적립액은 가입 기업이 늘어나면서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계약건수도 6만9000건을 넘어섰다.

금융권역별로는 은행의 시장 확대가 두드러진다. 지난해 6월 적립액 기준으로 43.2%였던 은행의 시장 점유율이 올 9월 말엔 52.5%까지 높아졌다. 증권업계의 점유율도 이 기간에 10.7%에서 12.5%로 약간 올랐다. 반면 생명보험과 손해보험 등 보험권은 46.1%에서 35.0%로 입지가 위축된 양상이다.

업체별로는 삼성생명이 1조6389억원으로 압도적인 적립액을 기록 중이고,뒤를 이어 국민은행(9251억원) 신한은행(8891억원) 우리은행(8671억원) 등 은행 '빅3'가 치열하게 경쟁 중이다. 증권사 중에서는 미래에셋이 2531억원으로 가장 많다. 유형별로는 원금보장형 상품으로 주로 운용하는 확정급여(DB)형이 64%로 절반을 넘고 실적배당형 상품까지 편입하는 확정기여(DC)형은 26%로 집계됐다.

금융계는 내년이 퇴직연금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되는 원년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국회에 계류 중인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안이 내년에 통과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개정안은 △자영업자의 퇴직연금 가입 허용 △신설 기업의 퇴직연금 자동 가입 △DB형과 DC형에 대한 동시 가입 허용 등 퇴직연금 가입을 촉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2011년부터는 현행 퇴직보험 · 신탁에 대한 법인세 감면이 사라져 기업들은 기존 퇴직금을 퇴직연금으로 전환할 것으로 관측된다.

이렇게 되면 퇴직연금 시장 규모도 빠르게 확대될 것으로 기대된다.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가 내년 이후 퇴직연금 규모를 추정한 결과 올해 163만명 수준인 퇴직연금 가입자 수가 내년엔 233만명으로 늘어난 뒤 2020년까지 연평균 10.1%씩 증가할 것이란 결과가 나왔다. 이에 따라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도 올 연말 12조원대에서 내년 말이면 21조원으로 불어나고 2020년에는 149조원에 달할 전망이다.

이 연구소의 신세라 선임연구원은 "149조원은 향후 10년간의 연평균 임금 상승률과 퇴직연금 가입률 등을 보수적으로 가정하고 계산한 전망치"라며 "경우에 따라선 최대 200조원까지 불어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2007년 기준으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퇴직연금 비중은 미국이 74%,일본이 24%에 달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은 75%나 된다. 한국은 2020년이 돼도 이 비중이 10%대에 머물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퇴직연금 시장은 장기적으로 성장 여지가 많다는 얘기다.

◆미래에셋증권 DC형 수익률 5.71%

퇴직연금 시장 공략을 위한 금융사들의 경쟁도 날로 치열해지고 있다. 한 증권사 퇴직연금팀 관계자는 "같은 계열의 은행 증권 보험사 간에도 서로 정보공유나 협력체제를 가동하기 보다는 각개전투에 나서는 등 냉정한 승부가 펼쳐지고 있다"고 전했다.

은행은 여신거래 관계를 맺고 있는 기업이 많은 데다 곳곳에 포진한 지점망을 통해 밀착형 서비스가 가능하다는 점을 장점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보험권은 퇴직연금 시행으로 은행과 증권사에 빼앗긴 시장을 되찾겠다며 설욕에 나섰다. 증권사들은 자산관리 경험이 풍부하고 운용실적이 탁월하다는 점을 마케팅 포인트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올 3분기에 적립액 100억원 이상인 금융사 중 DB형 수익률은 은행권과 보험권이 1%대에 그쳤지만 삼성증권(2.26%) 미래에셋증권(2.03%) 등은 2%대 수익률을 기록하며 최상위권에 올랐다. DC형 역시 은행과 보험사들은 최고 3%대 수익률에 머물렀지만 미래에셋증권이 5.71%로 가장 좋은 성적을 낸 것을 비롯해 신한금융투자(5.05%) 삼성증권(4.42%) 한국투자증권(4.34%) 현대증권(4.33%) 대우증권(4.03%) 대신증권(4.00%) 등 주요 증권사들이 상위권을 차지했다.

김호범 대우증권 퇴직연금본부장은 "퇴직연금은 안정성과 수익성 모두 중요한 만큼 컨설팅과 리서치 역량을 키우는 것이 관건"이라며 "DC형 비중이 점차 증가하는 추세여서 자산운용에서 경쟁력이 높은 증권사들의 도약이 기대된다"고 강조했다.

박해영 기자 bon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