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30대 지인(남성)의 소개팅을 주선하게 됐다. '어떤 상대를 원하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냉큼 "30대 여성은 무서우니 피해 달라"고 답했다. 세상의 때가 덜 묻은 '어린 여성'이었으면 좋겠다는 주문이었다. "업무상 마주치는 여자들은 독하고 매섭다"는 부연설명과 함께.누구나 나이가 들면 '때'가 묻게 마련이다.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들은 그 '때'가 좀 더 묻게 마련이다. 남성들과 어떻게 싸워야 이기는지 알고,회사 내 '정치'에 익숙해지며,애인을 고를 때도 생각이 많아진다. 경제력이 뒷받침되면서 소비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어울리는 사람들도 업그레이드된다. 피부 탄력을 잃어가면서 얻게 된 일종의 지혜인 셈이다.

좌충우돌하던 20대를 보낸 30대 미혼 여성의 '나이듦'은 어떨까. 일하는 싱글 여성이 나이드는 법,웰에이징(Well-Aging)에 대한 얘기다. 지난 3일 저녁 서울의 한 스페인 레스토랑에서 각기 다른 일을 하는 30대 초반과 후반 여성 4명을 만나봤다.

▼사회(김정은 기자)=반갑습니다. 하시는 일이 다양합니다.

▼박용란 유앤파트너스 팀장(39)=원래 마케팅 일을 했고,3년 전 헤드헌터로 전직한 사회생활 15년차입니다. 먼저 회사에선 부장까지 달았는데 미련없이 그만뒀어요. 여성 중에 저보다 직급이 높은 사람이 없었고 미래도 보이지 않았죠.헤드헌팅은 제 능력껏 평가받을 수 있어 괜찮네요.

▼권은아 금강오길비그룹 국장(38)=저도 15년차입니다. 제일기획이 첫 직장이었고,중간에 미국 유학을 빼곤 줄곧 광고업계에서 AE(광고기획자)로 일했어요. 처음 입사할 때만 해도 '여자 AE의 수명은 5년'이라고 했죠.부침이 많은 이 바닥에서 즐겁게 일하며 버티고 있습니다.

▼이승원 리모와코리아 기획실장(31)=여행용 가방업체 리모와의 한국법인에서 일하고 있어요. 3년차이고요. 대학 졸업 후 다른 공부를 해보고 싶어 다시 대학(서울대 소비자아동학과)을 다니느라 좀 늦었어요.

▼김지영 YBM어학원 역삼센터 강사(30)=저는 미국에서 고등학교,대학교를 나와 영어강사를 한 지 6년째입니다. 영어가 너무 좋아 중학생 때부터 영어선생님이 꿈이었어요. 꿈을 이룬 거죠.어학원은 세 번째 옮겼고요. 지금 있는 곳에서는 성인들에게 회화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퇴근이 오후 2시예요. 직장 다니는 분들보다 자유롭긴 하죠.

▼사회=오늘 모신 분들은 다 30대입니다. 여러분의 30대는 20대와 어떻게 다른가요.

▼권은아= 저는 농담으로 이런 얘기를 해요. 나의 20대는 전쟁물,30대는 시트콤,40대는 드라마일 거라고.치열하게 20대를 보냈습니다. 미국 유학시절엔 우울증이 생겨서 자살을 기도한 적도 있었어요. 모아놓은 돈으로 훌쩍 떠났는데 금전적으로 쪼들렸고 마음도 피폐해졌죠.뛰어내리려고 아파트 난간에 올라섰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죠.'페이퍼부터 쓴 다음에 내일 죽어야지.' 그만큼 불안정했고 날이 서 있었어요. 30대를 거치다 보니 20대 때 가졌던 고민들이 조금 정리되는 것 같습니다. 많이 편안해졌고 풍요로워졌습니다.

▼박용란=저는 20대 때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려고 끙끙댔어요. 사장이 돼야겠다는 욕심도 부렸죠.그런데 나이가 점점 들다보니 안 되는 것은 쿨하게 인정하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 같네요. 그리고 좀 더 개인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나'만을 생각하게 된다고 할까요.

▼이승원=언니들 앞에서 할 얘기인지는 모르겠는데,저는 29살이었을 때 마음이 매우 조급했었어요. 해놓은 것 없이 30대를 맞이한다는 불안감이 들었어요. 서른 하나가 되고 나니 조급함은 많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사회=나이가 들면서 직급이 올라가죠.직장에서 어느 정도 한계를 느끼게 될 것 같은데.

▼김지영=어학원에서 나이 든 여성 강사를 '구조조정'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프리랜서 성격이 강한 업종인 데도 쉬쉬하면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어학원 측에선 나이 어리고 외모가 출중한 강사를 좋아하더군요. 물론 출산 후에도 왕성하게 강사 일을 하는 기혼여성도 있습니다. 나이와 외모에 맞설 나만의 실력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박용란=예전 회사에선 '유리천장'을 느꼈어요. 사실 제 삶에선 일이 80% 이상 차지하는데,좀 갑갑했죠.일부 대기업에선 오히려 남성을 역차별하는 경우도 봤어요. 대외 홍보용으로 여성을 남성보다 빨리 임원으로 승진시키는 거죠.여자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아선 안 되지만,특혜 역시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회=연애 이야기를 해 보죠.나이가 들면서 연애도 업그레이드되나요.

▼이승원=20대 때는 남자친구에겐 제가 많이 징징댔던 것 같아요. 시간 날 때마다 꼭 데이트를 해야 했고 일거수 일투족을 남자친구에게 맞췄습니다. 의존적 연애를 한 거죠.그 때는 키,얼굴,직업,집안 등 안 따지는 게 없었죠.지금 확 바뀌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좀 유연해진 것 같아요. 지금 남자친구는 만난 지 4년 된 두 살 연하의 컨설턴트예요. 남자친구가 차가 없는데,20대였으면 용납이 안 되는 일이죠.지금은 제가 차로 남자친구를 데리러 갑니다.

▼권은아= 저는 여덟 살 많은 남자친구가 있습니다. 전쟁같은 20대를 보내다 보니 그 때는 연애를 한 번도 하지 못했어요. 30대에 열병같은 연애를 거치면서 남자를 보는 가치관이 많이 정리됐어요. 사골을 고아서 애인에게 갖다주는 등 저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네요.

▼사회=결혼에 대한 압박은 없나요.

▼박용란=얼마 전 교제하던 애인과 그냥 '친구'로 남기로 했어요. 결혼에 대한 생각이 달랐고,두 집안의 가치관도 상이했거든요. 30대 중반까지만 해도 부모님이 결혼하라고 성화셨는데 요즘엔 조용하십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 사람과 연애를 한다고 해서 꼭 결혼을 해야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권은아=저희 어머니는 처녀시절 기자 생활을 하다 결혼 뒤엔 전업주부로 눌러앉으셨어요. 제가 어릴 때부터 늘 말씀하셨죠.능력이 되면 굳이 결혼할 필요 있냐고요.

▼김지영=명절 때 만나는 친척들마다 시집가라는 성화가 보통이 아닙니다. 결혼하는 친구들도 부쩍 늘었어요. 요즘 제가 받은 부케만 해도 여섯 개나 돼요.

▼사회=사실 여성들은 결혼과 출산,육아를 겪으면서 사회생활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권은아=친구 중에 돈 잘 버는 남편을 만나서 회사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된 경우가 많은데요,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가 있어요. 남편 돈 쓰려니 괜히 눈치보이고 치사하다고요.

▼박용란=저보다 능력이 더 뛰어난 데도 결혼 후 미련 없이 일을 그만 둔 친구들이 있습니다. 교양 있고 풍요롭게 잘 살더군요. 사실 좀 부럽긴 합니다. 그래도 내 능력을 사장시키는 것은 아깝죠.사회적 손실이기도 하고요.

▼사회=좀 이른 감이 있지만 노후 대비를 시작할 때인 것 같습니다.

▼박용란=30대가 되고 나서 재테크를 부동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집이 생긴다는 것은 명품백을 산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죠.

▼권은아= 저도 마찬가지예요. 사실 재테크에 영 젬병인데, 전세자금을 대출받고 이를 갚아나가는 게 유일한 재테크네요.

▼사회=멋지게 나이드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박용란=예전에는 남들에게 어떻게 비쳐질까 노심초사하며 사람들 시선을 많이 의식했어요. 나이먹는 게 싫어서 피부과 진료도 많이 받았죠.이제는 많이 편해졌습니다. 안 되는 건 쿨하게 인정하고,대신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고릅니다. 제 나이를 물어보고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있지만 신경쓰지 않아요. 늘 긍정적인 에너지를 내뿜으며 살고 싶거든요.

▼권은아=요즘 드라마에서 '시즌2'가 화두잖아요. 30대가 인생의 시즌2라면 40대는 시즌3이라고 생각해요. 시즌3은 지금과 다른 모습이겠죠.저의 40대를 기다립니다.

글=김정은/사진=정동헌 기자 likesmi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