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는다. 때문에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제 뜻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이 쉽게 익혀 날마다 쓰는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

세종대왕께서 밝힌 한글 창제의 목적이다. '가엾게'의 원문은 '어엿비'다. '어엿비'는 그러나 단순한 '가엾게'가 아닌 '불쌍하고 안타깝고 안쓰럽게'라는 느낌으로 다가선다. 한자를 몰라 답답한 백성의 심정을 헤아린 측은지심이야말로 시력을 잃으면서까지 한글을 만든 바탕인 셈이다.

한글은 이렇게 누구나 쉽게 알아듣고 소통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우리는 또 '마쿠도나르도'라고 하는 일본인과 달리 '맥도날드'라고 말하고 쓴다. 이처럼 뭐든 소리나는 대로 표기할 수 있어서인가. 우리말을 지키고 올바로 사용하는데 앞장서야 할 관공서와 방송이 오히려 외국어와 은어,비속어를 남발한다.

'데이케어센터'(치매환자 돕는 곳),'시프트'(서민대상 장기임대 전세주택),'맘프러너'(mom+entrepreneur,엄마 사업가),'어반 테라스'(마포대교와 원효대교 사이 한강변 접근로) 등 서울시가 만들어낸 이름들은 도통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렵다.

정부의 서민 대상 정책도 다르지 않다. '마이크로 크레딧'(서민 대상 소액 대출),'휴먼네트워크 선도 멘토 포럼'(유명인사들의 취약계층 자녀 돕기 모임) 등.방송에선 우리말을 푸대접하다 못해 학대한다. 스팀받다,다이하다,메이드하다,스킨 타치,페이머스 코미디안,킹 오브 문자….

말엔 묘한 전염력이 있다. 처음엔 귀에 거슬리던 말도 자꾸 들으면 그런가보다 무심해지고 쓰게도 된다. 경남 진주에선 청소년 언어 절반이 비속어 · 은어인데 이유는 '남들이 쓰니까'와 '재미있어서'라는 조사 결과도 있다. 10명 중 6명은 문제를 못느끼거나 관심도 없다는 마당이다.

한글 반포 563돌을 맞아 문화체육관광부가 6~12일을 한글주간으로 정하고 '한글,세상을 담는 아름다운 그릇'이란 주제 아래 각종 행사와 대회를 마련하고 있다.

말은 얼이다. 말이 망가지면 정신도 망가지기 십상이다. 한글날 기념행사에 그칠 게 아니라 공공기관과 방송의 잘못된 언어 사용을 바로잡기 위한 근본적이고 체계적인 대책을 마련해야만 한다. 한글 창제의 근간이 백성에 대한 '어엿비 여김'임을 잊지 말고.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