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한가위다. 민족 최대 명절이다. 그렇지만 직장인들에겐 마냥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고향에 가려면 교통지옥을 겪어야 한다. 여기저기 챙겨야 할 선물 부담도 만만치 않다. 시댁의 '시'자만 나와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아내의 '명절 증후군'도 온몸으로 감당해야 한다.

솔로 직장인이라고 편한 게 아니다. "언제 결혼할 거냐"는 어른들의 질문 공세에 시달려야 한다. "옆집 아들은 벌써 아이가 둘이다"는 압력을 견디는 것도 만만치 않다. 이쯤 하면 몸이 추워져 '추석'이요,마음이 무거워져 '중(重)추절'이 됐다는 우스갯소리가 가슴 속 깊이 와닿는다.

이 와중에도 여전히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를 외치며 자기만의 필살기로 지혜롭게 추석을 나는 김 과장,이 대리가 많다. 어려움을 피해가기보다는 주어진 조건에서 한가위의 기쁨을 만끽하는 건 자기만의 노하우다.

◆너도나도 "연휴 때 출근할래요"

국내 유명 호텔에서 일하고 있는 정모씨(32 · 여).결혼 4년차인 정씨는 이번 추석연휴를 '힘들게' 반납했다. 회사일이 많아 귀향을 할 수 없이 포기한 게 아니다. 연휴 때 일하고 싶어하는 여직원들이 너무 많아 그들을 물리쳐야 했기 때문이다. 호텔 예약 업무를 담당하는 여직원은 모두 10명.이들이 모두 추석연휴 때 출근하겠다고 손들었다. 다름아닌 '명절 증후군' 때문.시댁에서 하루 종일 음식 만들고 시댁 식구들 뒤치다꺼리하는 것보다 차라리 회사에서 일하는 게 편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정씨는 10명 중 5명에게만 돌아가는 추석 특근의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 빠른 공채 기수를 앞세웠다. 그게 먹히지 않는 직원들에게는 밥 사먹이며 회유한 끝에 뜻한 바를 이룰 수 있었다.

대형마트에 다니는 최모 과장(34 · 여)도 '일하는 추석'이 즐겁기만 하다. 결혼 초만 해도 어떻게 해서라도 명절마다 휴가를 내 시댁에 얼굴도장을 찍었다. 그렇지만 해가 갈수록 시누이와 동서들의 등쌀을 이겨낼 자신이 없어졌다. 며느리들 비교하기 좋아하는 시어머니의 취향을 맞추기도 갈수록 버거워졌다. 게다가 대형마트의 대목인 추석 때 눈치 보며 휴가를 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 과장은 "명절 기간 내내 시댁에 가서 고생하느니 차라리 명절 기간에는 일하고 명절 전후에 시댁에 가는 게 더 나은 것 같다"며 기꺼이 추석 특근조에 합류했다.

맞벌이 여성들이 시댁 방문 대열에서 이탈하는 데는 남편들의 암묵적인 지원도 한 요인이다. 아내가 시댁에 가기 전에는 신경이 날카로워지고,다녀온 뒤에는 온갖 짜증을 낸다. 그걸 다 받아줄 바에야 차라리 하고 싶은 대로 놔두는 게 상책이라는 게 맞벌이 남편들의 솔직한 고백이다.


◆선물은 재활용,'미드'는 재관람

명절 때마다 길 위에 버리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는 건 귀성객들의 한결같은 소망이다. 홍보대행사 직원인 노원호 대리(31)는 고민 끝에 그 대안을 찾았다. 드라마와 애니메이션이 그것이다. 특히 미국 드라마(미드)는 그의 든든한 동반자다. 고향인 광주광역시까지 10여시간 내내 차 안에 있어도 '미드'만 있으면 지루하지 않다. 졸음 운전도 예방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노 대리는 올해엔 해리포터 시리즈와 선덕여왕을 몽땅 내려받아 즐길 생각이다. 노 대리는 "운전 중에 집중해서 드라마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예전에 봤던 프로그램 중 재미있었던 것들을 다시 보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모 중견기업에 다니는 이상훈씨(35)는 이번 추석 때는 본가에만 들르기로 결정했다. 명절 때마다 강원도 강릉인 처가와 부산인 본가를 모두 방문하는 게 힘에 부쳤기 때문.게다가 올해는 연휴가 짧아 동선을 줄여야 하는 확실한 명분까지 생겼다. 이씨는 "맏아들이 아니어서 추석은 본가에서,설날은 처가에서 지내기로 합의했다"며 "공평한 결정이었는지 생각보다 양가 모두 덜 섭섭해 했다"고 전했다.

대기업 영업팀에 근무하는 장인기 차장(42)은 추석 때마다 본가와 처가에 보내는 선물 때문에 고심한다. 특히 경기불황으로 지갑이 얇아진 올해는 고민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현금을 드리자니 양가 부모님을 만족시킬 만한 액수를 맞추기가 쉽지 않다. 선물을 드리자니 웬만한 물건은 예상했던 액수를 훌쩍 뛰어넘는다. 장 차장이 고민 끝에 생각한 것은 선물 재활용.회사에서 상여금 대신 추석 선물로 준 참기름 세트와 거래처에서 보내 온 버섯을 부모님들께 드리기로 결정했다.


◆추석맞이엔 여행과 골프가 제격

대기업에 다니는 싱글족 조민호 과장(36)은 짧은 연휴를 이용해 일본 후쿠오카에 나홀로 여행을 다녀올 계획이다. 산더미 같은 업무에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한 측면도 있지만 실제는 친척들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한 도피성 여행에 가깝다. '결혼 안 하냐' '여자친구 언제 데려오냐' '결혼하려면 살 좀 빼라' '왜 부모님 걱정시키냐' 등 안쓰러운 표정으로 한마디씩 던지는 집안 어른들의 공세는 이제 견디기 힘들 정도다.

이미 해외 출장이란 알리바이를 만들어 부모님과 입을 맞춰놓았다. 작년만 해도 추석을 이용해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 항공권 예약이 하늘의 별따기였다. 올해에는 신종 플루 덕분에 항공권 예약도 수월하게 해결했다.

결혼 2년차인 최모씨(29 · 여)는 서울 시내 호텔에서 머무를 계획이다. 툭 하면 야근인 남편 탓에 신혼생활을 제대로 즐기지 못해 둘만의 시간이 절실했다. 이번 연휴에 모처럼 둘 다 짬이 나 그동안 제대로 못했던 대화도 나누고 2세도 가져볼 생각이다. 추석 전날 서울에 있는 시댁에서 간단히 점심식사를 같이 한 다음 바로 호텔로 직행할 예정이다.

카드회사 김모 과장(36)은 추석 때 처가 식구들과 스크린 골프 내기를 하기로 했다. 처남과 처형은 물론 장인어른과 한 홀당 1만원씩 걸기로 했다. 김 과장은 "그동안 추석 때면 처가와 본가를 오가며 기름진 음식에 술만 먹어 늘어난 체중 때문에 짜증이 났는데,이번엔 그런 게 없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특히 가족 간 우애도 다질 수 있는 데다 '용돈 벌이'도 가능하다는 게 김 과장의 생각이다.


◆모든 걸 잊고 명상에 빠지기도

추석을 맞아 평소 차가 자주 막혀 가기 힘들었던 곳을 찾는 이들도 있다. 제약회사 정현식 대리(32)는 "명절에 명동이나 동대문 남대문 시장 등 평소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짜증났던 곳에 홀가분하게 놀러가기 좋다"며 "올해엔 차례를 지내고 부모님과 같이 동대문 시장에 구경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일상생활에 찌든 스트레스와 피로를 풀기 위해 가족들과 템플 스테이를 하는 이들도 있다. 은행원인 최모 부장(49)은 명절 때만 되면 가족들을 데리고 휴대폰이 안 터지는 곳에서 요가와 명상,트래킹 등을 체험하며 묵은 체증을 풀고 온다. 정신이 맑아져 추석 이후엔 괜한 우울증이나 다시 출근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거의 없다. 그는 "오히려 완전한 충전이라는 느낌이 든다"고 만족감을 표시했다.

정인설/이관우/이정호/김동윤/이고운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