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이 필요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회사 성장까지 막으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서로 잘해보자는 취지인데…."

쌍용자동차 노조의 민주노총 탈퇴 투표가 진행된 8일 현장에서 만난 조합원 손모씨가 한 이 말은 쌍용차 조합원들이 왜 민주노총에서 탈퇴하려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이날 투표에선 '수많은 손씨'가 민주노총에 반대표를 던졌다. 민주노총 탈퇴 지지율은 무려 73.1%로 나타났다. 회사 없인 조합도 없다는 분노의 의사가 표출된 결과다. 쌍용차 노조의 투표 결과는 집행부 주도 없이 개별 조합원들이 직접 나서 탈퇴를 성사시킨 첫 사례라는 의미도 갖는다. 조합 집행부들이 민주노총 탈퇴를 주도한 다른 사례와는 구분된다.

쌍용차 노조원들이 민주노총에 느끼는 감정은 한마디로 '배신감'이다. 사측이 2646명의 감원을 담은 정상화 방안을 발표했을 때만 해도 노조원들 중 상당수는 민주노총 금속노조의 강경투쟁 방침을 적극 옹호했다. 하지만 지난 5월부터 8월까지 77일간에 걸쳐 진행된 옥쇄파업으로 얻은 것은 황폐화된 생산시설과 눈돌린 소비자,파산 위기에 몰린 회사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속았다'는 인식이 급속도로 확산됐다.

투표장에서 만난 조합원 박모씨는 "2006년 옥쇄파업 당시에도 강경한 기류가 있었지만 회사가 흔들리면 안된다는 최소한의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에 보름여 만에 회사 측 의견을 수용하고 파업을 풀었다"며 "하지만 이번 파업은 투쟁 방침 결정과 지휘에 금속노조 지도부가 깊숙이 간여하다보니 회사의 존폐 위기조차 무시한 채 이념투쟁으로 흘렀다"고 비판했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탈퇴 총회에 대해 '회사 측 공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며 "금속노조 지도부가 얼마나 조합원들의 이해와 동떨어져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덧붙였다.

전날 박금석 쌍용차 지부장 직무대행을 비롯한 지도부가 청와대 인근지역에서 "사측이 저열한 공작을 통해 민주노총 탈퇴를 부추기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금속노조 게시판 등에는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는 등 조합원들의 냉담한 반응이 이어졌다.

옥쇄파업 당시 가담하지 않고 외부에서 지켜본 조합원들이 민주노총에 느끼는 반발은 더욱 심하다. "떠나는 딜러들과 냉담해지는 소비자들을 보면서 '도대체 (도장공장)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위기감을 못 느끼나'하는 답답함이 들었다"며 "나중에 금속노조 지도부가 계속 강경투쟁을 독려했다는 말을 듣고 울분이 터져 나왔다"고 토로했다.

쌍용차 조합원들은 이번 총회에서 금속노조 탈퇴 건 이외에 선거관리위원회 구성 안건도 통과시켰다. 선거관리위원회가 구성되면 내달 새 집행부를 선출하기 위한 투표에 들어가게 된다. 새 위원장 후보 중에서는 친민주노총 후보가 출마할 전망이다. 추가 구조조정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다시 사측과 대립각을 세우고 이 과정에서 친민주노총 후보가 당선되고 민주노총이 다시 간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쌍용차 노조원들의 민주노총에 대한 반감을 고려하면 당선 전망은 밝지 않다. 민주노총 탈퇴를 주도했던 한 조합원은 "아직 선거를 지켜봐야 하지만 새로운 집행부는 당분간 독립조직을 지향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쌍용차 노조의 민주노총 탈퇴는 현대차 등 다른 완성차 노조에도 파장을 미칠 전망이다. 실제로 현대차 지부의 선거를 앞두고 금속노조 정책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현대차 지부에 따르면 오는 15일로 예정된 지부장 선거를 앞두고 '전진하는 현장노동자회'(전현노) 소속 이경훈 후보는 '금속노조를 바꾸지 못하면 현자지부도 무너진다'는 선거 유인물을 내고 "기업지부는 단순히 해체의 대상이 아니라 산별노조가 제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반드시 유지돼야 한다"고 금속노조의 지부전환 정책을 반대했다.

앞서 "현대차만 금속노조 투쟁의 선봉에 서 철저히 희생만 강요당하고 있다"며 반금속노조 기조를 가장 먼저 제기했던 '현장연대' 소속 홍성봉 후보 측도 이날 "금속노조 이렇게 확 바꾼다'는 유인물을 다시 내고 현대차 지부의 특성을 살린 기업지부 유지 방침을 밝혔다.

고경봉/평택=조재길/울산=하인식 기자 kg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