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일부 남성들 사이에서 “국내 도입이 시급하다”는 말이 나돌던 가슴골패션(클레비지 룩)이 어느덧 한국 사회에서도 자리를 잡아갈 것이란 ‘기대(?)’가 커지고 있다. 속옷 회사의 마케팅 탓인지 모르지만 은근히 관련 패션이 유명 연예인들을 중심으로 해서 퍼져나가고 있는 것.

수많은 영화나 만화 등을 통해 익숙하게 알 수 있듯이, 이같은 ‘가슴골 패션’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서양에선 절대주의 시대에 극단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가슴 노출이 활성화 됐었다. 오늘날엔 감히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프랑스 절대주의 시대에는 여왕 마리 앙트와네트의 가슴을 석고로 떠서 여성의 유방모양 과일그릇을 만들 정도로 가슴을 드러내는 패션이 유행했다. 데콜테라는 가슴을 드러낸 패션이 등장한 배경에는 신분을 한눈에 구분하기 위한 욕구도 담겨있었다.>

예를 들어 프랑스 베르사유의 소 트리아농궁을 장식하던 과일그릇은 여성의 유방을 모델로 해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이 그릇은 공쿠르 형제의 전언에 따르면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의 유방을 그대로 석고로 본떠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여왕의 젖가슴 형태로 만들어진 그릇에는 탄생의 설화가 있다. 어느날 궁전에 모인 귀부인들 사이에 누구의 가슴이 가장 아름다운가 하는 얘기가 오가다 (당연하게도) 만장일치로 왕비인 마리 앙트와네트의 가슴이 1등을 차지했다는 것. 이 ‘미의 대회’ 우승을 기념해 왕비는 자신의 가슴을 석고로 떠서 예술적인 모형을 만드는 것을 허락했다고 한다.

이처럼 절대주의 시대에 극단적으로 발달한 가슴노출은 이전 세대와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게 역사가들의 설명이다. 르네상스 시대에도 여자들은 자신의 가슴을 남자들의 눈앞에 드러냈지만 절대주의 시대와는 그 의미가 달랐다는 것. 르네상스 시대에는 자연 그대로(의복의 부족이나, 수유의 의미를 띄며) 드러냈다면 절대주의 시대에는 (성정 의도를 가지고)도발적으로 노출시켰다는 데서 차이가 있다는 설명이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저절로 드러난 유방을 여자들이 손이나 얼굴을 가리지 않듯, 자연스런 표현의 일환으로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시대가 흐르면서 여성의 유방은 옷속으로 꼭꼭 숨어들어 갔다. 하지만 절대주의 시대에 들어서면 한번 감췄던 유방을 가슴이 파인 의복형태인 데콜테(데콜타쥬)가 발달하면서 의도적으로 다시 드러내게 됐다는 게 풍속사가 에두아르트 푹스의 분석이다.

특히 이 시대에는 코르셋을 통해 가슴의 형태를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방식을 취했다. 여자들은 상의를 될 수 있는 한 넓게 깊게 팠고, 심지어 영국 찰스2세의 궁정에서는 궁정여인들의 복장이 모두 가슴을 완전히 드러낸 것이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가슴노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목걸이 역시 여성 가슴에 남자의 눈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고, 특히 황금 십자가 형태 목걸이가 인기를 끌면서 일부 ‘도덕적인’ 성직자들은 이를 신에 대한 모독으로 까지 생각했다고 한다.

여인들은 당당하게 가슴을 드러낸 채 거리를 활보했고 심지어 예배를 보기위해 교회로 향했으며, 일부 고식적인 성직자들은 교회에 그같은 복장을 한 채 오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같은 풍습은 강력한 세를 얻었고, 17-18세기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선 오히려 일부 교단의 수녀들까지도 가슴을 드러내놓고 다녔다고 한다. 당시 수녀원이 귀족집안 재산분할 방지를 위해 딸들을 보내는 처리장이거나 명문 귀부인들이 한때 이런 저런 이유로 숨어살거나 했던 귀족계급의 기숙사 같은 것이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그다지 놀랄만한 일도 아니라는 시각이다.

이같은 가슴노출은 시대가 흐르면서 발전하는 양상을 보였다. 유방의 아름다움을 노골적으로 노출시키는 것은 17세기 하반기에 시작되서 18세기초가 되면 목 밑으로 2졸 이상 노출하는 게 예의없는 일이 됐지만, 이어 18세기 중엽에는 어깨와 가슴 대부분을 매우 품위있게 노출시키는 의상이 유행하는 형태로 ‘발전’을 거듭했다.

하지만 이같은 가슴이 한껏 파인 옷은 아무나 입을 수 있는게 아니어서 당시 지배계급은 하층계급 여인들이 가슴이 깊이 파인 옷을 입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상류계급 여인들은 한눈에 미천한 민중과 구별되기 위해 가슴을 드러내는 눈부신 특권을 독점하려고 했다.가슴골 패션이 유행한데는 엄격한 신분 구분에 대한 욕구와 당시의 사회 경제적 배경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듯, 유행은 변덕을 부려 몇 년 뒤에는 턱까지 모든 것을 꽁꽁 감싸는 의상으로 다시 되돌아갔다고 한다.

패션 분야에 문외한이긴 하지만, 최근 몇년간 여성 패션은 노출 트렌드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강화되는 추세인 듯 하다.먼 훗날에는 어쩌면 현대의 한국이, 유럽의 절대왕정 시대처럼 ‘노출의 시대’로 규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노출은 과연 어느 선까지 확대될지, 또 21세기가 막 시작된 한국 사회에서 ‘노출’이 계속해서 힘을 얻는 사회·경제·문화적 배경은 무엇일지에 대해 과연 어떤 해석과 설명이 나올 것인가?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

<참고한 책>
에두아르트 푹스, 풍속의 역사3-色의 시대, 이기웅·박종만 옮김, 까치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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