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깎이 골퍼' '볼보이 출신' '바람의 아들' '야생마'

2009년 8월17일.남자 골프 메이저대회 USPGA 챔피언십에서 타이거 우즈를 꺾고 우승하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양용은(37 · 테일러메이드)의 별명이다. 지금은 아시아인 최초의 메이저 챔피언이 됐지만 별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의 골프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1972년 제주 출생인 양용은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생활비를 벌 요량으로 골프연습장에서 볼을 줍는 일을 하며 골프에 입문했다. 당시 나이 19세.현재 '우즈를 깰 선수'로 주목받고 있는 로리 매클로이(영국)가 20세,앤서니 김이 24세인 것을 감안하면 양용은은 골프를 늦게 시작한 셈이다. 골프 입문 2년 후에는 군 복무(보충역)로 18개월의 공백까지 있었다.


1991년 제대 후 제주 오라CC 드라이빙레인지에서 프로들의 동작을 눈으로 익히며 본격적으로 골프를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조명 시설도 갖춰지지 않은 연습장에서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라이트를 켜놓고 연습하곤 했다.

입문 3년째인 22세 때 투어 프로가 되기로 작심하고 뉴질랜드로 건너갔다. 필드 경험을 쌓기 위해서다. 마침내 24세 때인 1996년 국내 프로 테스트에 합격,본격적인 프로의 길을 걷는다. 최경주보다 3년 늦은 프로 데뷔였는데 이렇다할 아마추어 경력이 없었기 때문인지 그를 주목한 사람은 없었다. 그 이듬해엔 상금 랭킹 9위에 올라 신인왕을 차지했으나 상금은 생활비에도 못 미치는 1200만원에 그쳤다. '이러다간 가족 부양도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골프를 그만둘까도 생각했지만 골프에 대한 미련을 접지 못했다. 레슨 코치로 일하면 돈을 벌 수 있었지만,투어 프로 한길만 걸어온 양용은은 골프 레슨을 하지 않고 연습과 대회에만 참가하는 고난의 길을 택했다.

프로 전향 6년째인 2002년.그에게도 봄날이 왔다. SBS 최강전에서 생애 첫 승을 올리며 이름을 알린 것.그러나 국내 무대는 그에게 양이 차지 않았다. 2004년 일본에 진출한 그는 일본 데뷔 연도에 2승을 올렸고 그 뒤에도 2승을 추가했다. 2006년에는 한국오픈에서 레티프 구센,부바 왓슨 등 초청 선수들을 제치고 우승한 여세를 몰아 상하이에서 열린 유러피언투어 HSBC챔피언스에서 우즈 등을 제치고 정상에 올라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다.

양용은이 일본을 딛고 미국 무대에 처음 도전한 것은 2005년.그러나 퀄리파잉 토너먼트(Q스쿨)에서 보기 좋게 낙방했다. 2007년 '삼수' 끝에 Q스쿨을 공동 6위로 통과,고대하던 미국 무대에 진출한다. 그러나 '루키 연도'인 2008년은 그에게 또 한번의 시련의 해였다. 29개 대회에 출전해 17차례 커트를 통과했으나 '톱10'에 단 한 차례 들 정도로 성적이 보잘것 없었다. 상금 랭킹 157위로 시드를 잃었다. 가족들을 미국으로 이주시킨 터여서 물러설 데가 없었던 그는 네 번째로 Q스쿨을 봐야 했다. 다행히 최종일 선전 덕분에 1타 차로 시드를 회복할 수 있었다.

양용은은 2008 혼다클래식 최종일에는 혼자 플레이하는 수모를 당했다. 4라운드에 진출한 선수 가운데 맨 꼴찌였는데 잘한 선수부터 둘씩 조를 편성하다 보니 그의 동반 플레이어가 없었던 것.1시간53분 만에 18홀을 마쳤는데,경기 후에도 그를 위로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난 1월 소니오픈 때에는 하와이까지 날아가 '빈 자리'를 기다렸으나 허탕치고 돌아오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런 평가를 뒤로 하고 양용은은 한번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지난 3월 혼다클래식 우승에 이어 메이저대회인 USPGA챔피언십까지 거머쥔 것.그는 강풍이 불었던 이번 대회 2라운드에서 '바람의 아들'답게 2언더파를 치며 9위로 도약했으며 3라운드에서 이번 대회 18홀 최소 타수 타이를 기록한 뒤 대역전승을 거뒀다. 우즈조차 "오늘 양용은은 대단했다. 17번홀에서 실수로 보기를 한 것을 빼면 한 샷도 놓치지 않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볼보이 출신의 무명 골퍼가 '골프 황제'와 어깨를 나란히한 감격적 순간이었다.

김경수 기자 ksm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