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역단체장 솔직토크] (5) 박준영 전남도지사 … 태양광·2천개 섬이 '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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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 복원·관광카지노 기필코 추진
박준영 전남지사는 묵묵히 움직인다. 농부의 아들이기 때문일까. 때가 돼야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농부처럼 일하고 기다린다. 참배나무에 참배나고 돌배나무에 돌배난다는 좌우명은 그의 철학을 관통한다. 도(道) 재정과 사회간접자본이 태부족이고 눈에 띄는 산업이 없는 녹색지대 전남에 그는 최적격자인지 모른다. 5년간 속에 담아둔 한이 많아서 일까. 그는 자정이 오는 것도 잊고 다섯 시간 넘게 전남의 과거와 현재,미래를 쏟아냈다. 영산강 살리기는 꼭 해야 한다는 박 지사.그의 솔직하고 격의 없는 참배, 돌배 얘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전남도는 요즘 사정이 어떻습니까.
"어렵습니다. 지자체들은 나름대로 고민을 안고 있습니다만 전남은 정말 더 어렵습니다. 우선 인구가 문제입니다. 전남 인구는 1년에 3만6000명씩 꼬박꼬박 줄어 들고 있어요. 매년 1개 군(郡)이 사라지는 셈입니다. 65세 이상 노령인구는 17%로 전국 최고이지요. 떠나는 인구 중에 젊은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아서 생긴 현상 아니겠습니까. 지난 40년간 우리나라 인구가 3000만명에서 4800만명으로 62% 늘어날 때 전남은 350만명에서 192만3000명으로 거꾸로 42% 줄었습니다. 재정자립도도 전국 꼴찌이고 사회간접자본(SOC)도 아주 열악해 성장동력이 전체적으로 떨어져 있어요. "
▼도지사가 고민만 해서는 안되잖아요.
"고민하고 연구했지요. 우리가 가진 비교우위가 도대체 뭐냐?그랬더니 맑은 공기,풍부한 일조량, 바람,넓은 갯벌과 수많은 섬,뭐 이런 천혜의 자연조건들이 오히려 장점으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더군요. 그래서 만든 것이 '녹색의 땅 전남'이란 지역브랜드입니다. 2005년 초 친환경먹거리산업,신재생에너지,해양경영을 해야겠다고 결정한 직후 창안했습니다. 생명산업 5개년계획을 세워 1%에 불과했던 친환경농업 비중을 4년째인 지난해 32%로 확대했습니다. 천일염도 그렇게 해서 새로 발굴한 겁니다. 성분 조사 결과 미네랄이 중국산은 4~5%에 불과한 데 비해 전남산은 20%나 함유돼 있었습니다. 이구택 전 포스코 회장한테 전남산 천일염이 건강에 좋다고 만나면 자주 권했는데 나중에 내 말이 꼭 맞더라고 그럽디다. "
▼농수산업 비중이 큰데 기업화는 했나요.
"농수산업의 효율을 높이려면 기업화 규모화가 필요합니다. 어류 양식도 먼 바다로 나가 크게 하라고 했습니다. 거문도 앞바다에 대규모 외해 수중 가두리 양식장을 운영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장흥에는 무기산을 쓰지 않고 김을 양식하는 조합식 기업으로, 올초에 어민 100여명이 출자한 '장흥 무산김 주식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전남 수산업 기업화 1호입니다. 이 게 자리잡아가면서 지금은 완도전복주식회사,신안 젓새우주식회사 등 5~6개가 뜨고 있습니다. "
▼관광자원이 세계 수준이라는데.
"전남에는 '리얼코리아'라 할 수 있는 관광자원이 많습니다. 신안군에만 1004개 섬이 있는데,말 그대로 천사의 섬입니다. 은하계 별처럼 촘촘히 박힌 2000개가 넘는 섬,그래서 '갤럭시 아일랜드'라 이름 붙였는데 앞으로 이들 섬을 각기 특색 있게 개발할 작정입니다. 미국엔 사우전드(1000) 아일랜드가 있는데 한국에 투사운전드(2000) 아일랜드가 있는 거죠.그런데도 매년 우리나라를 찾는 관광객은 600만명으로 몇 년째 제자리 걸음입니다. 관광카지노는 가능하면 빨리 할수록 좋습니다. "
▼여수엑스포와 J프로젝트는 잘 진행되나.
"여수엑스포는 기본계획까지 마무리 됐고 재정 투입과 민간 투자 유치 절차를 밟고 있는 중입니다. 고급 숙박시설이 부족해서 현재 도가 숙박시설 유치에 적극 나서고 있습니다. 정부 재정이 4대강 등에 많이 쓰여 엑스포 관련 예산이 줄어들지 모른다는 걱정도 있어요. 서남해안 관광레저 도시 조성사업인 J프로젝트는 전 세계 금융위기 여파 등으로 기업들의 투자심리가 위축돼 삐걱대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풍부한 관광자원이 많아 잘 진척되리라 믿습니다. "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 산업은 어떤지.
"전남지역이 일조량이 많은데 조사해 보니 ㎡당 3300㎉나 돼요. 우리나라 평균이 3020㎉이고 수도권이 2700㎉이죠.전남이 이렇게 일조량이 많으니까 사람들이 태양광 발전을 하러 앞다퉈 전남을 찾고 있습니다. 지금은 전국 태양광 발전의 45%를 전남지역에서 생산하고 있습니다. 태양광뿐 아닙니다. 2000개 섬 사이로 조류가 엄청난 속도로 흐릅니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지인 울돌목에 세계 최대 규모 조류발전소가 설치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수자원공사에서 풍력도 조사했는데 섬으로 나가면 평균 초속 7.5m 이상 나옵니다. 그래서 섬지역을 중심으로 요즘 풍력발전소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습니다. "
▼다른 미래산업도 있나요.
"미래산업 구상을 구체화할 7개 기관을 설립했습니다. 첫번째가 화순의 생명의학센터입니다. 여기에는 국내 최초로 녹십자의 신종플루 백신공장이 들어서 현재 백신 생산에 나서고 있습니다. 나주의 식품 가공을 연구하는 식품산업연구센터와 식품산단,나노와 바이오를 접목해 신소재를 개발하고 유효성분을 추출하는 장성의 나노바이오연구센터,천적을 이용해 방제하는 곡성의 생물방제연구센터 등이 현재 궤도에 올라와 있습니다. 또 아토피 호흡기환자 발생률이 전국에서 가장 낮은 장흥에는 천연자원연구소와 한방산업연구소를 설립해 생약성분 연구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완도의 해양바이오연구 및 창업지원센터도 전남의 미래를 밝혀줄 한 축이 될 겁니다. 순천의 마그네슘 클러스터를 중심으로 하는 신소재산업과 고흥을 중심으로 조성하려는 우주산업 클러스터도 전남의 미래가 될 것입니다. "
▼기업 유치를 위한 전남도만의 노력은.
"주민들의 기업에 대한 마인드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지사로 취임하자마자 기업사랑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건 아마 전남이 시초일 겁니다. 상공회의소,노조 등과 함께 노사 등반대회도 열고 해외 사례도 돌아보며 열심히 다녔습니다. 또 하나는 경제교육입니다. 어린이경제교실을 열어 어른부터 아이까지 참가시켰습니다. 2005년부터는 대학생을 대상으로 매년 모의투자대회도 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창업한 벤처동아리가 벌써 수십 개가 넘습니다. "
▼영산강 뱃길복원사업에 대한 입장은.
"영산강은 꼭 개발해야 합니다. 영산강 둑길이 있는데 관리부재 상태로 20년 넘게 방치되다 보니 악취와 함께 수질이 극도로 나빠졌습니다. 여기에 하구언이 들어서면서 토사가 쌓여 강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처음 내가 준설을 해야 한다고 했을 때 환경단체에서 지사가 모래를 팔아먹으려 한다는 근거 없는 소문을 내기도 했습니다. 영산강 수질이 나쁜 것은 모두가 알기 때문에 운하 얘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
▼행복마을도 추진하셨죠.
"남도의 특징이 한옥인데 왜 전남에는 한옥이 없느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옥을 만들려고 보니 건축비가 평당 700만원 선이 나왔어요. 당시 도내 도시지역 아파트 건축비보다 훨씬 높았던 거죠.반응이 냉랭했어요. 전남도가 한옥 한 채당 2000만원을 지원하고 2%대 저리 융자금 3000만원을 지원해주겠다고 했지만 회의론이 일었어요. 그러나 2007년 말 무안 약실마을,고흥 명천마을 등 5개 마을에서 처음 시작한 행복마을 사업이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지금은 주민 신청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휴가철엔 민박으로 활용되면서 새로운 주민소득원으로 자리잡고 있기도 해요. "
첫 월급 1만8000원…기자 해직…강단 설 기회 올떄마다 '유혹'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볼까요.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9남매 중 여덟 번째이며 아들로는 막내였지요. 쟁기가 장난감이었습니다. 쟁기질을 나만큼 잘 하는 사람도 없을 거예요. 내가 어릴 때는 모든 가정이 어려웠습니다. 그런 시절이었어요. 부모님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논밭 팔고 소 팔고 해서 나를 학교에 보내 주셨어요. 지금은 우스운 얘기지만 내 형들은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대학에 다녔지요. 부친의 병세가 악화되고 가세가 기울어 중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1년간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학업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 없어 서울로 올라가 아침에는 신문 배달을 하고 낮에는 중국집에서 일했어요. 그리고 야간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성균관대를 다니던 시절에도 생활의 여유가 없어 2년여 동안 책가방 하나 들고 동가식 서가숙했던 기억이 납니다. "
▼결혼은 중매로 하셨나요.
"네,1976년에 여조카가 소개했는데 아내(최수복씨)는 당시 고등학교 교사였습니다. 첫눈에 '이 여자다'하고 결정했습니다. 내가 박봉을 받는 처지여서 돈버는 사람을 아내로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서…(하하).아내가 워낙 내조형이라 수많은 우여곡절 속에서도 애들을 잘 키웠습니다.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아내 자랑이 너무 심했나요!"
▼딸부자라면서요.
"딸만 셋인데 모두 시집을 안가 손자를 아직 못봤습니다. 서른둘이 된 큰딸은 영국에서 금융회사에 취직해 일하고 있고요. 간혹 전화를 통해 국제 금융위기에 대한 얘기를 나눕니다. 배울 게 많아요. 셋째는 대학생입니다. 둘째가 희한하게 골프에 소질이 있어요. 미국 특파원 시절 내가 골프를 배우게 됐는데 그때 애들과 함께 연습장에 갔었지요. 그런데 둘째가 골프에 관심을 보이더군요. 그래서 좀 가르쳐 봤는데 곧잘 해요. 미국에서 13세 이하 아마대회 우승을 할 정도였지요. 국내로 돌아와서 상비군 대표도 했어요. 골프를 잘 했지만 대학은 특기생이 아닌 일반전형으로 갔어요. 이대 체육과죠.나는 항상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골프백에 책을 꼭 넣어줬습니다. 지금은 박사과정 논문을 쓰는 중입니다. "
▼해직기자 출신으로 힘든 시기를 겪었을 것 같은데.
"사실 기자생활은 시작 때부터 순탄치 않았습니다. 1972년 9월 언론사에 합격해 그해 11월부터 근무했는데 10월에 이른바 '10월유신'이 터졌습니다. 군대갔다 와서 복학하고 4학년이었는데 선배들이 언론사도 끝났다며 입사를 만류하는 겁니다. 월급도 1만8000원밖에 안됐어요. 당시 하숙비가 1만5000원이었어요. 한마디로 박봉이었죠.언론사 입사 전에 합격했던 한 직장은 월급이 4만3000원이어서 갈등도 좀 했습니다. 그런데 사회가 암울할수록 언론인이 되면 할 일이 많겠다 싶어 그냥 언론사를 다니기로 결심했습니다. 언론인과 해직의 길은 마치 운명같아요. 광주민주화운동 때 신문 제작을 거부하면서 해직됐는데 한편으론 '잘됐다. 이 기회에 그동안 하고 싶었던 공부나 실컷 하자'며 미국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
▼정치에는 언제부터 뜻을 두었나요.
"난 정치를 연구해 보고 싶긴 했지만 직접 해야겠다고 생각해 보지는 않았습니다. 관료도 마찬가지입니다. 머리 속에는 늘 기자생활을 접으면 학교로 간다는 생각뿐이었죠.1997년 대통령 선거가 끝난 시점에 모대학에 교수로 임용돼 강의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그때 대통령을 모셔 보라는 제안이 왔습니다. 학교에서 강의하기로 돼 있다는 사정을 얘기했죠.그래도 해보라고 해서 한참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먹었습니다. '정권 교체가 처음이고 민주화운동을 해 온 김대중 대통령의 철학들이 실현될 텐데 그런 대통령을 모시고 일하는 것이 새로운 역사가 될지 모른다. ' 그 전에 개인적으로 김 대통령을 만난 적은 없습니다. 중앙일보 미국 특파원 시절 한 번 만났고 정치2부장 때 대북 문제로 얘기 좀 하자고 해서 조선호텔 중국집에서 만난 것이 전부입니다. 청와대 공보수석 시절 대통령을 모시고 해외에 갈 일이 자주 있었는데 해외 정상들에게 우리나라에 투자해달라며 쓸개도 내놓을 정도로 끈질기게 설득하는 모습을 보면서 울기도 하고 크게 배우기도 했습니다. 지사를 하면서 독일 바스프사로부터 투자를 유치했는데 그때 경험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
▼도지사는 어떻게 출마하게 됐습니까?
"청와대에서 나와서 학교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민주당이 분당되고 입당을 강권하는 겁니다. 난 정치에 관심없다고 손사래를 쳤는데 막무가내더라고요. 당시 조순형 대표와 사무총장께서 수없이 전화를 해왔습니다. 할 수 없어 선거 운동도 도왔지요. 추미애 의원과 함께 했어요. 그런 후 다시 학교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2004년 4월쯤에 박태영 전 지사께서 돌아가셨어요. 사흘이 지났을까. 이번엔 지사 보궐선거에 나가 보라는 전화가 왔어요. 나간들 이길 수 없었어요. 여론조사 결과 50 대 25로 진다는 거예요. 아내는 결사반대했어요. 어려운 가운데 표를 던져준 도민들에 대한 고마움을 늘 간직하고 삽니다. "
▼ 무엇이 가장 재미있고 어려웠나요.
"재미로 따지면 생활자체가 역동적인 기자가 가장 재미있고,보람은 외환위기 당시 청와대 공보수석으로 일한 것이지요. 가장 힘든 것은 역시 전남지사지요.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하고 책임도 져야 하니까요. "
▼자녀들 교육에서 강조하는 부분은.
"아이들이 어릴 적에는 음식을 절대 남기지 말고 김치는 무조건 먹으라는 얘기를 많이 했어요. 음식을 남기면 죄받는다는 거죠. 내가 겪었던 얘기도 해줍니다. '간장과 마가린, 김치를 넣고 밥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색깔만 다르지 딱 벌집같이 된다. 내가 자취할 때는 마가린이 최고의 영양식이었는데 무조건 같이 넣고 비볐다. 음식 버리지 말고 감사히 먹어라.' 이런 얘기를 해 주면 밥투정하던 아이들도 금방 숟가락을 듭니다. "
정리=최성국/사진=정동헌 기자 skchoi@hankyung.com
박준영 전남도지사는…
출생: 1946년 전남 영암
학력:목포중 인창고 성균관대
경력:중앙일보 편집부국장, 청와대 공보수석,국정홍보처장,동국대 신방과 겸임교수
좌우명:참배나무에 참배 열리고 돌배나무에 돌배 열린다.
주량:소주1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