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역단체장 솔직토크] (4) 정우택 충북지사…'빅 바이오 충북' 기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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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만에 20조원 투자유치
정우택 충북지사는 '투자유치의 달인'으로 불린다. 취임 3년 만에 20조원 규모의 기업투자를 유치한 데서 붙여진 별명이다. '정우택의 실적'은 충북의 변화를 대변한다. 과거 충북은 점잖고 조용했다. 수도권과 전라권이 투자유치로 시끌벅적할 때도 양반 충북은 눈만 껌벅거렸다. 정 지사는 그런 충북을 깨우려 했다. 사방팔방이 6적(경기도 충남 대전 전북 강원도 경남)에 둘러싸인 지리적 한계를 조자룡처럼 뚫고 기업투자를 끌어 들였다. "기업 투자를 유치하면서 몸 빼고 다 팔아봤다"는 정 지사.고생이라곤 손톱만큼도 해본 적이 없는 듯한 귀공자풍의 정 지사를 파헤쳐 보기 위해 지난 16일 서울에서 그를 만났다.
▼투자유치 실적이 놀라운데
"취임 3년 만에 153개 기업,20조5979억원이라는 전국 최고의 투자유치를 이끌어 낸 데서 '투자유치의 귀재'라는 별명까지 붙여진 것 같아요. 취임 초기부터 '경제특별도 충북 건설'을 최우선 과제로 정하고 투자유치에 올인한 결과이지요. 충북의 투자유치 실적은 부풀리기가 전혀 없는 정직한 집계입니다. 순수 제조업만 카운트한 통계지요. 저만큼 알짜배기로 투자유치를 해온 사람 있으면 데려와 보십시오. 5000억원 규모의 프로로지스사의 물류시설을 비롯해 신정지구 리조트(3695억원),KT전산센터(2000억원) 등 서비스 업종들은 실적에서 빠져 있어요. 또 투자유치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부지 매매계약을 체결한 이후에 투자협약을 체결하고 있습니다. "
▼국내 투자만 있고 외자유치는 없다는 지적도 있습니다만.
"처음에는 외국업체를 타깃으로 뉴욕 등에 나가 투자설명회(IR)를 적극적으로 했습니다. 하지만 큰 성과가 없었어요. 그래서 생각을 바꿨지요. 나는 대통령이 아니라 충북지사이기 때문에 국내든 국외든 투자를 많이 끌어오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국내 투자유치도 어려웠어요. 2006년 '충북은 경제특별도'라는 구호로 내걸 때만 해도 한국을 떠나는 기업들이 많았습니다. 노사분규와 인건비 상승에 못 견딘 중소기업들이 해외로 해외로 나갔지요. 그래서 해외로 나가려는 기업들을 국내에 주저앉혀야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외국회사에는 50년 무상임대에다 각종 세금감면 등 엄청난 특혜를 주면서 국내기업들에 특혜를 주지 않는다는 게 기업들이 가진 불만이었어요. 공략 포인트를 제대로 잡은 셈입니다.
아시다시피 정보기술(IT)산업과 주거단지가 혼합된 오창산업단지는 2002년까지만 해도 허허벌판이었어요. 모텔만 덩그러니 서너 개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가보면 김정일이 중국발전상을 보고 말했다는 천지개벽에 견줄 만해요. IT업종 공장만 130개 이상 들어와 있습니다. 작년 말 통계를 보니까 생산액이 5조2000억원에다 고용인원만 1만2000명을 넘었어요. 홍보도 덜 됐고 상대적으로 서울시민들이 관심을 두지 않고 있어 눈에 띄지 않을 뿐입니다. 하여간 충북은 뭘해도 눈에 잘 안 띄어요. (하하)"
▼오창에 이어 오송에서 또한번의 천지개벽을 기대해도 되나요.
"오송도 예전의 오창처럼 지금은 벌판입니다. 현재 계속해서 기공식이 이어지고 있어 3~4년 뒤면 공장지대로 변합니다. 여기에다 첨단의료복합단지까지 오게 되면 금상첨화지요. 지금은 유동성 문제도 있고 경기도 좋지 않아 착공을 미루는 투자자들이 많습니다. 2011년쯤 되면 경기도 풀릴 것으로 예상돼 넉넉잡아 4~5년 지나면 투자유치한 20조원이 모두 들어올 겁니다. "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수도권 규제를 더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충북도는 거꾸로 반대한다면서요.
"무조건 잘못됐다는 게 아니에요. 1968년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수도권집중 문제가 불거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MB정권처럼 수도권완화 대책이라고 해서 카테고리로 묶어서 뻥 터뜨린 적은 없었어요. 수도권 규제완화는 케이스바이케이스로 해주라는 얘깁니다. 대표적인 게 LG필립스LCD(지금은 LG디스플레이)입니다. 투자자가 수도권 투자를 희망하거나 산업특성상 수도권이 아니면 곤란한 경우라면 수도권 규제를 완화해주되,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균형발전 쪽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또하나는 100년 만의 불경기여서 경기진작책으로 발표했다고 하는데 너무 조급했다는 생각입니다. 세월이 지나면 교통 · 환경 · 사회적비용이 수도권에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할 겁니다. "
▼'균형발전'에 대한 해법 가지고 있나요.
"미국을 보세요. 동부에서 서부로 개척해 나가면서 애틀랜타같은 거점도시들을 만들어 갔습니다. 그리고 거점대학을 만들었어요. 세계 최고의 명문 하버드대학도 매사추세츠주에 있어요. 우리도 경제는 물론 교육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진정한 균형발전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의료시설만 해도 그렇습니다. 대구사람들도 대구병원 안 가고 KTX타고 서울간다고 합니다. 대구에도 좋은 병원을 세워 충분히 치료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
▼양복깃에 'BIG'이라고 쓰인 배지가 있는데 무엇인가요.
"'빅바이오 충북'을 의미합니다. 충북하면 빼놓을 수 없는게 바이오산업입니다. 지금은 어느 지자체나 바이오를 들먹이지만 충북은 일찍이 바이오에 눈을 떴어요. 1997년 국가가 인정한 최초의 바이오 단지가 오송과학단지입니다. 식약청 독성연구소 등 국내 6대 국책연구기관의 이전이 이미 결정됐고 기공식까지 했습니다. 국내의 웬만한 제약회사는 모두 집결할 겁니다. 미국 3대 바이오메카 중의 하나로 꼽히는 몽고메리카운티 같은 곳입니다. "
▼바이오 쪽은 벌써부터 가시적인 성과가 있다고 들었는데.
"충북바이오펀드 1호로 메디톡스에 총 15억원을 투자했는데 3년 만에 31억원을 회수했어요. 이 회사의 지난해 매출이 100억원이었는데 2000억원 달성도 무난할 것 같아요. 충북도는 돈을 거둬들이는 일만 남았습니다. 이 회사 외에도 충북에는 유망바이오 회사들이 넘쳐납니다. 사실 다른 도에서는 바이오로 성과를 얻은 경우가 별로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
▼증평 음성 쪽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데.
"LG화학이 리튬전지 생산을 위해 음성에 1조원을 투자합니다. 구본무 회장까지 내려와 기공식을 했어요. 태양광도 우리가 일찍 눈을 떠 셀,모듈 등 관련부품의 60%가 충북에서 생산됩니다. 태양광 사업을 하는 현대중공업도 충북으로 끌어들였죠. 벌써 3000억원을 투자했는데 앞으로 1조원까지 투자하겠다고 합니다. 증평도 천지개벽하고 있어요. 신성홀딩스 한국철장 에이알테크 등 단지하나가 완전히 태양광입니다. 다우코닝 LED공장도 증평공장 증설에 성공했어요. 다우코닝 최초의 해외연구소도 유치했습니다. "
▼공직에서 잘 나가다가 왜 험난한 정치인의 길을 택했나.
"정치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어요. 5선을 지낸 정운갑 의원이 아버님입니다. 정치인들이 우리 집에 모이면 항상 거실바닥에 엎드려 귀를 대고 무슨 말을 하나 엿듣곤 했어요. 고시공부도 집에서 했는데 아버님이 몸담았던 10대 국회의 의원들 프로필을 모두 외울 정도였죠. 아버님이 "잘되면 고향을 꼭 챙기라"는 말씀을 늘 하셨어요. 그런데 전두환 정권 들어 아버님이 정치규제로 활동을 못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정치를 안 하겠다'고 다짐한 적도 있었어요. 1988년 4 · 15총선에서 여소야대가 되면서 국정감사가 부활됐어요. 그때 국회담당으로 차출되면서 다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1991년 경제기획원에서 과장으로 승진했는데 이듬해 시무식 다음 날인 1월4일 사표를 내고 출마했어요. 3월24일 14대 국회의원 선거를 3개월도 안 남겨둔 시점이었죠."
▼집안,외모,경력 등 꿀릴 게 없어 보이는데 콤플렉스가 있나요.
"솔직히 아직도 서울대 법대를 못 간게 가장 큰 콤플렉스로 남아 있어요. 당시 경기고는 반에서 40등 정도까지 서울대를 갔어요. 줄곧 3위권 밖으로는 나간 적이 없어 담임선생님도 자신했는데 결국 재수를 했고 이후에도 고배를 마셨죠. 재수 시절에는 솔직히 술도 좀 마시고,여자도 만났습니다. 9월달부터 찬바람이 나면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죠. 시험 1주일을 남겨두고는 더 이상 공부할 게 없다는 자신감에 놀았습니다. 무엇에 홀린 것 같이 또다시 고배를 마시자 어머니께서 "아무리 자신있는 일이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꾸짖으셨어요. 그 자리에서 좌우명을 '진인사대천명'으로 정했습니다. "
▼가장 좌절했던 때는 언제였고,어떻게 극복했나요.
"1992년 첫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했을 때와 2004년 선거에서 3선을 앞두고 떨어졌을 때입니다. 2004년에는 모두들 전국 최다득표는 떼어 놓은 당상이라고 했어요. 4월15일 선거를 코앞에 두고 상대후보는 정해지지도 않은 상태였죠. 3월에 선거운동차 돌아다니니까 전국최고 득표할 텐데 뭐하러 힘들여 다니냐고 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느닷없이 3월12일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면서 민심이 하루아침에 뒤바뀌었어요. 선거를 한 달도 채 안 남겨두고 나타난 상대후보에게 어이없이 지면서 크게 좌절했습니다.
1992년 첫 출마에서 낙선한 뒤에는 4년 후를 기약하며 정말 뼈를 깎는 노력을 했어요. 그때 햇볕을 너무 많이 쬐고 다녀 피부병이 생겼어요. 얼굴에 아직도 그때 흉터가 훈장처럼 남아 있습니다. 낙선하고 나서 3일째 되던 날부터 집사람과 가가호호 인사를 하고 다녔죠. 유권자들이 '당선된 사람도 가만히 있는데 낙선한 사람이 왜 다니냐'며 의아해하더군요. 그 뒤 4년 동안 고시공부나 박사공부할 때보다 더 열심히 뛰어다녔어요. 4년을 하루같이 집사람과 함께 박카스를 차에 싣고 다니며 산등성이건, 논두렁 밭두렁이건 사람이 보이기만 하면 미친 듯이 달려가 손을 붙잡고 매달렸지요. 그 결과 여당 국회의원이자 관선 도지사까지 지낸 상대후보를 이겼습니다. "
▼총각시절 맞선을 100번 이상 본 것으로 유명한데 사모님은 어떤 분인가요.
"행정고시에 붙고나자 여기저기서 중매가 들어와 100번 이상 선을 본 것 같아요. 하지만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어요. 솔직히 차인 적은 딱 한 번입니다. 연세대 '백마'라고 불리던 유명한 '퀸카'였는데 모 그룹의 딸이었죠. 집사람은 사촌여동생의 소개로 만났어요. 당시 유명한 음반회사 사장 딸이었는데 한마디로 첫눈에 반했습니다. 이 여자다 싶어 데이트 2~3번하고 무조건 청혼했죠. 크리스마스 이브에 처음 만나 그 다음 해 1월30일 약혼하고 3월25일 만난 지 3개월 만에 초스피드로 결혼에 골인했습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건 겸손하고 매사에 신중해요. 정치인 마누라는 설치지 않아야 하는 게 가장 중요한데 정말 '딱'입니다. 나다닐수록 표를 깎아먹는 스타일과 활동할수록 표를 끌어오는 유형이 있는데 우리집 사람은 한 번 움직이면 표를 한 트럭씩은 끌어오는것 같습니다. (하하)"
▼'아들에게 물려줄 희망'이라는 책도 썼는데 자녀들에게 특별히 강조하는 덕목은.
"아들만 둘입니다. 보다 큰 세계를 쳐다보며 꿈을 갖고 또 꿈을 실현해 나가는 사람이 돼라고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정치인 집안이지만 자식들은 정치를 안 했으면 좋겠어요. 보다 전문성 있는 분야에서 국가에 봉사했으면 합니다. 다행히 큰 아들은 바이오메디컬엔지니어링을 전공했습니다. 둘째는 미국 컬럼비아대학을 졸업하고 레바논 동명부대 정보요원으로 뽑혀 지난 1월 파병됐어요. "
▼성장기는 어떻게 보냈나요.
"매우 호기심이 많았어요. 대여섯살 때 할아버지가 피우시던 담배를 몰래 피워물다 아버님한테 걸려 혼쭐이 난 기억도 생생해요. 운전기사가 호스에 입을 대고 휘발유를 빨아 지프차에 넣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신기하다는 생각에 흉내를 내다 목구멍으로 기름이 넘어가 죽는 줄 알았어요. 어머님 앞에서 데굴데굴 굴렀던 일도 생각납니다. 무슨 일이든 알고 넘어가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을 정도로 호기심이 많아 엉뚱한 일을 많이 저질렀어요. 중 · 고등학교 시절 때론 친구따라 담배를 피우다 경찰에게 걸려 줄행랑을 놓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요샛말로 '범생이'였어요. "
▼외모와 성격을 보면 '연예인'기질이 있는 것 같은데.
"패션쇼에도 출연해 봤고 음악회 무대에도 자주 올라 색소폰도 불었습니다. 얼마 전 방영된 TV드라마 '카인과 아벨'에 출연여부를 타진하다 일정이 맞지 않아 꿈을 이루지 못했어요. 학창시절부터 문화예술과 운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잘못하다간 딴 길로 빠진다고, 부모님께서 엄격하게 통제하셨어요. 문화예술은 항상 마음 속에 묻어둔 첫사랑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런 기질 때문에 문화사업을 많이 한 것 같기도 해요. 지난해 문화선진도를 선포하고 숙원이던 도립예술단도 창단했습니다. 150억원 규모의 문화재단과 문화예술포럼을 만들었고 전국 지자체 가운데 최초로 충북문화헌장도 제정했습니다. 메세나운동에도 적극 나서 14개 기업체와 예술인들을 맺어줬어요. "
정리=백창현/사진=허문찬 기자 chbaik@hankyung.com
▼투자유치 실적이 놀라운데
"취임 3년 만에 153개 기업,20조5979억원이라는 전국 최고의 투자유치를 이끌어 낸 데서 '투자유치의 귀재'라는 별명까지 붙여진 것 같아요. 취임 초기부터 '경제특별도 충북 건설'을 최우선 과제로 정하고 투자유치에 올인한 결과이지요. 충북의 투자유치 실적은 부풀리기가 전혀 없는 정직한 집계입니다. 순수 제조업만 카운트한 통계지요. 저만큼 알짜배기로 투자유치를 해온 사람 있으면 데려와 보십시오. 5000억원 규모의 프로로지스사의 물류시설을 비롯해 신정지구 리조트(3695억원),KT전산센터(2000억원) 등 서비스 업종들은 실적에서 빠져 있어요. 또 투자유치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부지 매매계약을 체결한 이후에 투자협약을 체결하고 있습니다. "
▼국내 투자만 있고 외자유치는 없다는 지적도 있습니다만.
"처음에는 외국업체를 타깃으로 뉴욕 등에 나가 투자설명회(IR)를 적극적으로 했습니다. 하지만 큰 성과가 없었어요. 그래서 생각을 바꿨지요. 나는 대통령이 아니라 충북지사이기 때문에 국내든 국외든 투자를 많이 끌어오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국내 투자유치도 어려웠어요. 2006년 '충북은 경제특별도'라는 구호로 내걸 때만 해도 한국을 떠나는 기업들이 많았습니다. 노사분규와 인건비 상승에 못 견딘 중소기업들이 해외로 해외로 나갔지요. 그래서 해외로 나가려는 기업들을 국내에 주저앉혀야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외국회사에는 50년 무상임대에다 각종 세금감면 등 엄청난 특혜를 주면서 국내기업들에 특혜를 주지 않는다는 게 기업들이 가진 불만이었어요. 공략 포인트를 제대로 잡은 셈입니다.
아시다시피 정보기술(IT)산업과 주거단지가 혼합된 오창산업단지는 2002년까지만 해도 허허벌판이었어요. 모텔만 덩그러니 서너 개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가보면 김정일이 중국발전상을 보고 말했다는 천지개벽에 견줄 만해요. IT업종 공장만 130개 이상 들어와 있습니다. 작년 말 통계를 보니까 생산액이 5조2000억원에다 고용인원만 1만2000명을 넘었어요. 홍보도 덜 됐고 상대적으로 서울시민들이 관심을 두지 않고 있어 눈에 띄지 않을 뿐입니다. 하여간 충북은 뭘해도 눈에 잘 안 띄어요. (하하)"
▼오창에 이어 오송에서 또한번의 천지개벽을 기대해도 되나요.
"오송도 예전의 오창처럼 지금은 벌판입니다. 현재 계속해서 기공식이 이어지고 있어 3~4년 뒤면 공장지대로 변합니다. 여기에다 첨단의료복합단지까지 오게 되면 금상첨화지요. 지금은 유동성 문제도 있고 경기도 좋지 않아 착공을 미루는 투자자들이 많습니다. 2011년쯤 되면 경기도 풀릴 것으로 예상돼 넉넉잡아 4~5년 지나면 투자유치한 20조원이 모두 들어올 겁니다. "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수도권 규제를 더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충북도는 거꾸로 반대한다면서요.
"무조건 잘못됐다는 게 아니에요. 1968년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수도권집중 문제가 불거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MB정권처럼 수도권완화 대책이라고 해서 카테고리로 묶어서 뻥 터뜨린 적은 없었어요. 수도권 규제완화는 케이스바이케이스로 해주라는 얘깁니다. 대표적인 게 LG필립스LCD(지금은 LG디스플레이)입니다. 투자자가 수도권 투자를 희망하거나 산업특성상 수도권이 아니면 곤란한 경우라면 수도권 규제를 완화해주되,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균형발전 쪽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또하나는 100년 만의 불경기여서 경기진작책으로 발표했다고 하는데 너무 조급했다는 생각입니다. 세월이 지나면 교통 · 환경 · 사회적비용이 수도권에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할 겁니다. "
▼'균형발전'에 대한 해법 가지고 있나요.
"미국을 보세요. 동부에서 서부로 개척해 나가면서 애틀랜타같은 거점도시들을 만들어 갔습니다. 그리고 거점대학을 만들었어요. 세계 최고의 명문 하버드대학도 매사추세츠주에 있어요. 우리도 경제는 물론 교육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진정한 균형발전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의료시설만 해도 그렇습니다. 대구사람들도 대구병원 안 가고 KTX타고 서울간다고 합니다. 대구에도 좋은 병원을 세워 충분히 치료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
▼양복깃에 'BIG'이라고 쓰인 배지가 있는데 무엇인가요.
"'빅바이오 충북'을 의미합니다. 충북하면 빼놓을 수 없는게 바이오산업입니다. 지금은 어느 지자체나 바이오를 들먹이지만 충북은 일찍이 바이오에 눈을 떴어요. 1997년 국가가 인정한 최초의 바이오 단지가 오송과학단지입니다. 식약청 독성연구소 등 국내 6대 국책연구기관의 이전이 이미 결정됐고 기공식까지 했습니다. 국내의 웬만한 제약회사는 모두 집결할 겁니다. 미국 3대 바이오메카 중의 하나로 꼽히는 몽고메리카운티 같은 곳입니다. "
▼바이오 쪽은 벌써부터 가시적인 성과가 있다고 들었는데.
"충북바이오펀드 1호로 메디톡스에 총 15억원을 투자했는데 3년 만에 31억원을 회수했어요. 이 회사의 지난해 매출이 100억원이었는데 2000억원 달성도 무난할 것 같아요. 충북도는 돈을 거둬들이는 일만 남았습니다. 이 회사 외에도 충북에는 유망바이오 회사들이 넘쳐납니다. 사실 다른 도에서는 바이오로 성과를 얻은 경우가 별로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
▼증평 음성 쪽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데.
"LG화학이 리튬전지 생산을 위해 음성에 1조원을 투자합니다. 구본무 회장까지 내려와 기공식을 했어요. 태양광도 우리가 일찍 눈을 떠 셀,모듈 등 관련부품의 60%가 충북에서 생산됩니다. 태양광 사업을 하는 현대중공업도 충북으로 끌어들였죠. 벌써 3000억원을 투자했는데 앞으로 1조원까지 투자하겠다고 합니다. 증평도 천지개벽하고 있어요. 신성홀딩스 한국철장 에이알테크 등 단지하나가 완전히 태양광입니다. 다우코닝 LED공장도 증평공장 증설에 성공했어요. 다우코닝 최초의 해외연구소도 유치했습니다. "
▼공직에서 잘 나가다가 왜 험난한 정치인의 길을 택했나.
"정치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어요. 5선을 지낸 정운갑 의원이 아버님입니다. 정치인들이 우리 집에 모이면 항상 거실바닥에 엎드려 귀를 대고 무슨 말을 하나 엿듣곤 했어요. 고시공부도 집에서 했는데 아버님이 몸담았던 10대 국회의 의원들 프로필을 모두 외울 정도였죠. 아버님이 "잘되면 고향을 꼭 챙기라"는 말씀을 늘 하셨어요. 그런데 전두환 정권 들어 아버님이 정치규제로 활동을 못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정치를 안 하겠다'고 다짐한 적도 있었어요. 1988년 4 · 15총선에서 여소야대가 되면서 국정감사가 부활됐어요. 그때 국회담당으로 차출되면서 다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1991년 경제기획원에서 과장으로 승진했는데 이듬해 시무식 다음 날인 1월4일 사표를 내고 출마했어요. 3월24일 14대 국회의원 선거를 3개월도 안 남겨둔 시점이었죠."
▼집안,외모,경력 등 꿀릴 게 없어 보이는데 콤플렉스가 있나요.
"솔직히 아직도 서울대 법대를 못 간게 가장 큰 콤플렉스로 남아 있어요. 당시 경기고는 반에서 40등 정도까지 서울대를 갔어요. 줄곧 3위권 밖으로는 나간 적이 없어 담임선생님도 자신했는데 결국 재수를 했고 이후에도 고배를 마셨죠. 재수 시절에는 솔직히 술도 좀 마시고,여자도 만났습니다. 9월달부터 찬바람이 나면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죠. 시험 1주일을 남겨두고는 더 이상 공부할 게 없다는 자신감에 놀았습니다. 무엇에 홀린 것 같이 또다시 고배를 마시자 어머니께서 "아무리 자신있는 일이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꾸짖으셨어요. 그 자리에서 좌우명을 '진인사대천명'으로 정했습니다. "
▼가장 좌절했던 때는 언제였고,어떻게 극복했나요.
"1992년 첫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했을 때와 2004년 선거에서 3선을 앞두고 떨어졌을 때입니다. 2004년에는 모두들 전국 최다득표는 떼어 놓은 당상이라고 했어요. 4월15일 선거를 코앞에 두고 상대후보는 정해지지도 않은 상태였죠. 3월에 선거운동차 돌아다니니까 전국최고 득표할 텐데 뭐하러 힘들여 다니냐고 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느닷없이 3월12일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면서 민심이 하루아침에 뒤바뀌었어요. 선거를 한 달도 채 안 남겨두고 나타난 상대후보에게 어이없이 지면서 크게 좌절했습니다.
1992년 첫 출마에서 낙선한 뒤에는 4년 후를 기약하며 정말 뼈를 깎는 노력을 했어요. 그때 햇볕을 너무 많이 쬐고 다녀 피부병이 생겼어요. 얼굴에 아직도 그때 흉터가 훈장처럼 남아 있습니다. 낙선하고 나서 3일째 되던 날부터 집사람과 가가호호 인사를 하고 다녔죠. 유권자들이 '당선된 사람도 가만히 있는데 낙선한 사람이 왜 다니냐'며 의아해하더군요. 그 뒤 4년 동안 고시공부나 박사공부할 때보다 더 열심히 뛰어다녔어요. 4년을 하루같이 집사람과 함께 박카스를 차에 싣고 다니며 산등성이건, 논두렁 밭두렁이건 사람이 보이기만 하면 미친 듯이 달려가 손을 붙잡고 매달렸지요. 그 결과 여당 국회의원이자 관선 도지사까지 지낸 상대후보를 이겼습니다. "
▼총각시절 맞선을 100번 이상 본 것으로 유명한데 사모님은 어떤 분인가요.
"행정고시에 붙고나자 여기저기서 중매가 들어와 100번 이상 선을 본 것 같아요. 하지만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어요. 솔직히 차인 적은 딱 한 번입니다. 연세대 '백마'라고 불리던 유명한 '퀸카'였는데 모 그룹의 딸이었죠. 집사람은 사촌여동생의 소개로 만났어요. 당시 유명한 음반회사 사장 딸이었는데 한마디로 첫눈에 반했습니다. 이 여자다 싶어 데이트 2~3번하고 무조건 청혼했죠. 크리스마스 이브에 처음 만나 그 다음 해 1월30일 약혼하고 3월25일 만난 지 3개월 만에 초스피드로 결혼에 골인했습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건 겸손하고 매사에 신중해요. 정치인 마누라는 설치지 않아야 하는 게 가장 중요한데 정말 '딱'입니다. 나다닐수록 표를 깎아먹는 스타일과 활동할수록 표를 끌어오는 유형이 있는데 우리집 사람은 한 번 움직이면 표를 한 트럭씩은 끌어오는것 같습니다. (하하)"
▼'아들에게 물려줄 희망'이라는 책도 썼는데 자녀들에게 특별히 강조하는 덕목은.
"아들만 둘입니다. 보다 큰 세계를 쳐다보며 꿈을 갖고 또 꿈을 실현해 나가는 사람이 돼라고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정치인 집안이지만 자식들은 정치를 안 했으면 좋겠어요. 보다 전문성 있는 분야에서 국가에 봉사했으면 합니다. 다행히 큰 아들은 바이오메디컬엔지니어링을 전공했습니다. 둘째는 미국 컬럼비아대학을 졸업하고 레바논 동명부대 정보요원으로 뽑혀 지난 1월 파병됐어요. "
▼성장기는 어떻게 보냈나요.
"매우 호기심이 많았어요. 대여섯살 때 할아버지가 피우시던 담배를 몰래 피워물다 아버님한테 걸려 혼쭐이 난 기억도 생생해요. 운전기사가 호스에 입을 대고 휘발유를 빨아 지프차에 넣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신기하다는 생각에 흉내를 내다 목구멍으로 기름이 넘어가 죽는 줄 알았어요. 어머님 앞에서 데굴데굴 굴렀던 일도 생각납니다. 무슨 일이든 알고 넘어가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을 정도로 호기심이 많아 엉뚱한 일을 많이 저질렀어요. 중 · 고등학교 시절 때론 친구따라 담배를 피우다 경찰에게 걸려 줄행랑을 놓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요샛말로 '범생이'였어요. "
▼외모와 성격을 보면 '연예인'기질이 있는 것 같은데.
"패션쇼에도 출연해 봤고 음악회 무대에도 자주 올라 색소폰도 불었습니다. 얼마 전 방영된 TV드라마 '카인과 아벨'에 출연여부를 타진하다 일정이 맞지 않아 꿈을 이루지 못했어요. 학창시절부터 문화예술과 운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잘못하다간 딴 길로 빠진다고, 부모님께서 엄격하게 통제하셨어요. 문화예술은 항상 마음 속에 묻어둔 첫사랑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런 기질 때문에 문화사업을 많이 한 것 같기도 해요. 지난해 문화선진도를 선포하고 숙원이던 도립예술단도 창단했습니다. 150억원 규모의 문화재단과 문화예술포럼을 만들었고 전국 지자체 가운데 최초로 충북문화헌장도 제정했습니다. 메세나운동에도 적극 나서 14개 기업체와 예술인들을 맺어줬어요. "
정리=백창현/사진=허문찬 기자 chbai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