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와 정당은 '주인-대리인' 관계를 형성한다. 정당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국가권력의 교체는 국가전복을 의미한다. 정당이 존재하기 때문에 국가체제를 유지하면서 국정세력을 바꿀 수 있다. 정당 간의 경쟁은 '이념과 가치'에 기초한 '메뉴 경쟁'이다. 따라서 이념과 가치도 투표라는 '경쟁과정'을 통해 '발견'되는 것이다. 정치발전은 직전(直前) 선거에서 패배한 정당이 얼마나 '변신'하는가에 달려 있다.

민주당은 2007년 대통령선거의 패배를 계기로 철저한 자기성찰을 통해,국민에게 다가서는 새로운 진보를 모색했어야 했다. 그러나 촛불집회가 역설적으로 그 같은 기회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촛불의 '기회손실'은 이중적이다. 한나라당에 '개혁과제의 표류'라는 치명상을 가져다주었다면,민주당에는 '새로운 진로' 모색을 위한 자기성찰의 기회를 앗아갔다. 치명적인 손실은 차라리 후자에 있다.

새 정부가 들어선 지 1년 반이 지났건만 민주당은 자신들만이 '민주화의 적자(嫡子)'라는 향수에 갇혀 여전히 '민주 대 반(反)민주'의 구도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한나라당으로의 정권교체도 그들 눈에는 민주주의 후퇴로 비쳐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토론보다는 '낙인'부터 찍으려 한다. '민주주의 위기'와 'MB악법'이 그 사례다.

정치의 첫 번째 미덕은 '책임정치'다. 과거의 정책결정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비정규직법'은 과거 민주당 작품이다. 실패는 두 가지 요인에서 비롯됐다. 첫째 누가 비정규직을 사회적 약자로 만들었는가에 대한 근본 성찰이 부족했다. 비정규직을 약자로 만든 것은 정작 '정규직 노조'였지만 기업의 '탐욕'때문에 비정규직에게 마땅히 지불해야 할 것을 지불하지 않아 비정규직의 처우가 낮아진 것으로 오인했다. 둘째 비정규직 처우 개선의 비용을 누가 부담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숙고하지 않았다.

실패를 인정하면 교정의 길이 보인다. 하지만 민주당은 정반대의 길을 갔다. 민주당 소속 환경노동위 위원장은 개정안을 상정조차 안했다.

비정규직법이 변변한 논의 없이 시행됨으로써 실업자를 양산한 데에는 민주당의 책임이 크다. 상정 거부는 개별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의 입법권을 제한하는 월권행위다. 또한 유예기간을 '6개월'로 한정하자는 민주당의 주장은 기실 비정규직법을 '기정사실화'하려는 것이다.

'미디어법' 반대도 그렇다. 방송사들과 언론노조는 기득권을 지키는 차원에서 반대한다 치더라도 민주당의 반대는 명분이 없다. 언론장악을 통해 영구집권을 꾀한다는 주장은 구차하기까지 하다. 오히려 그동안 "편파방송의 혜택을 누려왔음"을 자인한 꼴이다. 미디어법 개정을 위해 설치한 '사회적 논의기구'도 설득적이지 못하다. 사회적 논의기구에의 의존은 국회의 존재이유를 부정한 것이다. 사회적 논의기구를 방패삼을 것이 아니라,그리고 법안 상정을 물리력으로 막을 것이 아니라 '불일치에 대한 합의'(agree to disagree)에 근거해 반대 입장을 국민들에게 분명히 밝히고 '절차적 민주주의'에 승복했어야 했다. 미디어법이 악법이라면 후일 국민의 준엄한 심판이 내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가야 할 길은 명확하다. 비판세력을 넘어 대안세력으로서의 실력을 쌓고 국민의 신뢰를 얻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뉴민주당 플랜'의 시도는 높이 살 만하다. '집토끼론'에 연연하면 민주당에 기회는 없다. 오바마 대통령의 '정상을 향한 질주'도 교육을 통해 소수민족의 사회적 위상을 높여야 한다는 메시지다. 이를 '회절과 굴욕'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민주당이 정권을 되찾으려면 '새로운 진보'로써 철저히 변신해야 한다.


조동근 <명지대 교수ㆍ경제학/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