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서남표 총장이 임명되자 과거에 볼 수 없었던 변화가 몰려왔다. 교수승진 제도가 수술대에 올랐고,입학사정관제 등 입시에도 개혁 바람이 불었다. 그는 과학기술 이슈를 선도하는 데도 빨랐다. 신성장동력 프로젝트를 민간부문에서 주도적으로 기획한 것도 그다.

외부에서는 KAIST 개혁을 일제히 환영하고 나섰다. 그러나 내부평가는 엇갈리는 모양이다. 일각에서는 서 총장의 리더십이 독선적일 정도로 톱-다운(top-down)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에 대한 평가는 몇 년 후에나 더 정확히 나올지 모르겠다. 하지만 서 총장이 교육과 과학기술 분야에서 국민들의 이목을 끌 만한 이슈들을 주도하는 과학자인 것만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번에는 연구소에서 변화가 일고 있다. 대표적 정부출연연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세계적인 연구소를 목표로 원장 서치 커미티(search committee)를 구성, 몇 개월 동안 미국 유럽 등 전 세계로 기관장을 찾아 나섰다. 그 결과 한홍택 미국 UCLA 석좌교수가 새 원장으로 선임됐다. 전례가 없던 일이다.

한홍택 원장과 서남표 총장은 둘 다 미국 국적을 가진 한국계 미국인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들은 다 외국인이다. 이걸 보면 정부는 내심 출연연에서도 서남표식 변화를 기대하는 게 분명하다.

흥미롭게도 한 원장은 서 총장과는 다른 리더십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서치 커미티에 따르면 한 원장은 구성원 합의를 바탕으로 한 '컨센서스'형 리더에 가깝다고 한다. 과학자들의 다양한 리더십 경쟁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또 한 원장은 미국에서 여러 대학을 옮겨다녔고,가는 곳마다 다른 연구분야를 개척하고 성공한 경험을 보유하고 있다는 평가다. KIST에 새 바람을 불어넣을 가능성을 높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부가 모든 것을 간섭하는 정부출연연에서 한 원장의 변화 시도가 얼마나 먹혀들지 걱정이다. 한 원장은 국내외에서 좋은 과학자들이 몰려드는 연구소가 바로 세계적인 연구소라고 정의했다고 한다. 문제는 지금의 출연연 원장은 사람 한 명 제대로 뽑기 어렵고,예산을 유연성 있게 운용할 여지도 거의 없다는 데 있다.

또 서치 커미티가 만난 해외 석학들은 하나같이 원장으로 성과를 내기 위해선 최소 5년을 달라고 했다는 후문이다. 가뜩이나 낯선 한국 땅에 임기 3년만 보고 올 사람은 없었다는 얘기다. 그 때문에 3년 임기에 재임을 전제로 하는 편법이 동원됐다고 하지만 정권이 교체되면 그마저도 보장 못하는 게 우리 현실 아닌가.

이구택 전 포스코 회장은 국내에서 세계 일류기업이 나오고 있는데 세계 일류대학,일류연구소도 나와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자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일류기업이 유지되기 어렵다는 말이다. 세계 일류대학, 일류연구소가 빨리 나오려면 정부부터 확 변해야 한다.

1960년대 밥 먹는 것조차 걱정해야 하던 시절 박정희 대통령은 공무원들의 시시콜콜한 간섭을 배제하고 출연연에 자율성과 재원을 보장했다.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여유가 생긴 지금 과학기술의 모든 권력은 기획재정부와 관련 부처 공무원들의 손에 들어가 있다. 해외 석학들을 데려와 바보로 만들면 세계적인 대학,세계적인 연구소는 요원한 일이다.

안현실 <논설위원ㆍ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