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종옥(45)은 자신이 영리한 여자임을 주변 사람들이 단박에 눈치 채게 만든다. 입력(질문) 후 출력(답변)까지 걸리는 시간이 0.01초도 채 걸리지 않지만 답변은 늘 숙성돼 있다. 스스로 '별 생각 없는 애'라고 규정하지만,그것은 긴 고통의 터널을 통과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여유다. 그녀는 4년간의 학업 끝에 다음 달 고려대 언론학부 대학원에서 '텔레비전 드라마 게시판 반응과 제작구성원의 상호작용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는다. 유명 배우가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것은 국내 처음이다. 서울 압구정동 한 카페에서 그녀를 만났다.

"방송드라마 '천하일색 박정금'과 인터넷 게시판과의 상호작용 사례를 연구했어요. 결론적으로 게시판 의견이 좋으면 감독과 작가,배우들도 잘 움직였어요. 게시판 반응이 좋지 않으면 세 분야 사람들이 서로 싸우거나 충돌했어요. 작품성도 떨어졌고요. 게시판이 드라마에 확실히 영향을 미치더군요. " 특히 게시판이 생긴 후 뛰어난 작품성으로 마니아 층을 확보한 드라마는 살아남게 됐다고 했다. 시청률이 낮으면 조기 종영되거나 작품성이란 개념조차 없었던 예전과 달라진 흐름이다.

"게시판으로 인해 드라마의 다양성이 확보된 거지요. 이제는 무엇이든 독단적으로는 안 되는 세상이에요. 드라마도 소통을 통해 만들어야 합니다. 드라마란 결국 요즘 사람들의 생각을 보여주는 것이잖아요. "

논문 주제는 1998년 미니시리즈 '거짓말'에서 힌트를 얻었다. 유부남 직장 동료와 노처녀의 사랑을 다룬 이 작품은 불륜 드라마란 꼬리표를 떼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남자가 불륜을 숨기는 게 아니라 아내에게 사랑에 빠졌다고 털어놓고,부부의 사랑 문제를 대화로 풀어 간다는 점에서 시대를 앞섰던 드라마였다. 실제 당시 신매체로 등장한 PC통신 천리안에 시청자들이 '거짓말을 사랑하는 방'을 만들어 토론을 벌이며 사회적 이슈로 부각됐다.

"불특정 다수의 피드백(반응)을 처음 받은 사례였어요. 드라마에 영향을 끼친 수용자의 힘을 관심 있게 보게 된 거지요. "

그녀의 학위 도전은 사석에서 김민환 고려대 언론학부 교수와 만난 게 인연이 됐다. "배우 생활을 20여년 했다고 말했더니 내 경력이 독특하다 싶었던지 경험을 정리해 보는 건 어떠냐고 물으시더군요. 내 작업을 정리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싶었어요. 사실 남들이 보는 것과 달리 전 별 생각이 없는 애예요. '어렵겠지만 죽기야 하겠니'라며 시작했는데 된통 고생했어요. "

책을 읽어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게 많아 2학기 때 그만두려고 결심했다고 한다. 이때 "종옥아 뭘 해도 시간은 간다"는 선배의 충고를 새겨듣고 '잘하겠다'가 아니라 '끝내겠다'로 마음을 다잡았다. 중앙대 석사 과정에서 5년 쉬었다 논문을 썼을 때 너무 힘들었던 기억이 떠올라 '결석 안 하기'와 '다른 스케줄 안 잡기'를 생활화했다.

"연기는 감성적인 작업이고 공부는 이성적인 작업이라 충돌할 수밖에 없었어요. 처음에는 공부를 하면 뭘 잡아끄는 것처럼 머리가 아프고 힘들었어요. 연기 쪽 사람들은 그만두라고 말했지요. 촬영 현장에선 공부를 너무해 감성이 떨어졌다는 야단도 맞았어요. 어쨌든 공부하길 잘했다 싶어요. 선택의 폭이 넓어졌거든요. "

중앙대 연극영화과 겸임교수로 '매체 연기'를 강의 중인 그녀는 앞으로도 연기와 강의를 병행할 계획이다. 그리고 논문에서 할 수 없는 얘기들을 김민환 교수와 함께 책으로 써 볼 생각이다. '팔방미인'에게 연기와 강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입력했다. "연기가 강의보다 더 좋아요. 주제 의식이 있는 작품을 선호해요. 내 역할이 돋보이면 더 좋겠죠."

글=유재혁/사진=김영우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