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달 아래 고요히 앉아(靜坐月明中) 나직이 시를 읊자 맑은 냉기 물결 일고(孤吟破淸冷) 시내 건너 늙은 학은 찾아와(隔溪老鶴來) 매화꽃 그림자를 밟아 부수네(踏碎梅花影).'

11년째 김천 직지사 성보박물관장을 맡고 있는 흥선 스님(53)에게 가장 좋아하는 시 한 수를 청하자 중국 청대 시인 옹조(翁照)의 '매화오좌월(梅花塢坐月)'을 들려준다. 달밤에 시를 읊는 소리에 시냇물에 물결이 일고 그 냇물을 건너온 학이 매화꽃 그림자 아래 노니는 모습이 그림처럼 떠오른다. 흥선 스님이 한시 77수를 골라 우리말로 옮기고 에세이를 곁들인 한시 에세이집 《맑은 바람 드는 집》(아름다운인연 펴냄)을 출간했다. 지난 7년 반 동안 박물관 홈페이지에 보름마다 한 번씩 올린 한시와 짧은 글 170여편 가운데 추려서 엮은 것이다.

지난 4월까지 문화재 위원을 지낸 흥선 스님은 금석학에 조예가 깊은 학승.책에는 한국,중국의 한시가 섞여있지만 이름난 시인이나 시보다는 잘 알려지지 않는 시들을 계절별로 분류해 실었다. 그러면서 한시를 매개로 절집의 일상과 자연이 어우러진 생각의 뭉치를 풀어놓는다.

'이른 아침 죽을 뜨고 점심에는 밥 먹으며(晨朝喫粥齋時飯) 목마르면 아이 불러 차 한 잔을 달이게 하네(渴`則呼兒茶一椀)'로 시작하는 고려 나옹선사의 '영주가(靈珠歌)'에서 그는 죽과 차를 이야기한다. 돌아서면 배고파지는 것이 죽이요,그래서 가난한 시절을 겪은 어르신들은 외면하기 일쑤인 음식이지만 요즘처럼 먹을 것이 넘쳐나는 세상에서는 쉬 출출해지는 것이 오히려 미덕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죽은 채우기가 아니라 비우기를 가르치는 음식이 아닌가 싶다"고 덧붙인다.

흥선 스님은 "한시가 요즘 세상에서 매력적인 장르는 아닐 수 있으나 문기(文氣)를 전하는데 한시만한 것은 없다"며 "너무 어렵지 않으면서 잘 된 한시를 골라 제대로 번역한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한시를 가까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본적인 소양만 있으면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고도 좋은 시를 골라 소개하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다.

책을 넘기다보면 한시와 수필 못지 않은 즐거움이 또 있다. '펜글씨 교본'을 연상시킬 만큼 깔끔한 필체로 직접 쓴 한시와 한글 번역시가 페이지마다 실려 있다. 284쪽,1만3500원.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