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현 기자

지역구도로 짜여진 한국의 정치 풍토에서 ‘배지’를 달고 있거나 가슴에 품은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정당 공천을 목숨보다 소중하게 생각할 수 밖에 없다.국회의원은 물론이거니와 지방의회에서 일하는 시도의원 시군구의원이라고 예외는 아니다.지난주 공천의 무게가 어느 정도냐를 느끼게 해주는 일이 있었다.

부산 지역의 현역 A국회의원과 여의도에서 점심 식사 자리를 가졌다.그는 앉자마자 밑반찬이 채 깔리기도 전에 기자들에게 ‘깡소주’를 몇 순배 돌리더니 30분만에 “실례하겠다”며 자리를 떠버렸다.

이유인즉슨 자신의 지역구 B시의원이 간암으로 유명을 달리했다는 비보를 오전에 갑자기 듣게 됐다는 거였다.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투병 생활을 하던 중 사망해서 이제 곧 운구차가 빈소가 차려진 부산으로 출발하는데 “주중에는 지역구 방문이 어려우니까 그 전에 얼른 가서 영정 앞에 국화꽃이라도 한 송이 올리고 오는게 도리일 것 같다”고 했다.

A국회의원은 “이제 갓 쉰을 넘긴 B시의원이 그렇게 갈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부고를 듣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지역구에 같은 당 소속 시의원인데 간암 투병을 어찌 몰랐느냐고 물었더니 “서울에 입원을 했다기에 문병을 가려하니 B시의원의 부인이 ‘별일 아니다’며 한사코 못오게 해서”였단다.나중에 알고보니 B시의원은 간암 말기였다.

그가 한사코 A국회의원에게 병을 숨겼던 건 공천 때문이라고 했다.내년 지방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지방의원 공천권을 쥔 A국회의원이 혹시라도 “몸이 그런데 무슨 선거를 합니까”라며 공천을 안줄까 저어했던 것이다.영남권에서는 한나라당 공천이 당선 보증수표나 다름없다.당장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을 때조차 다음 선거의 공천을 생각해야 하는 정치인의 ‘팔자’가 한편으로는 측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지방의원들이 이렇게 공천에 목을 매달고 있다보니 한나라당은 내년 지방선거 때까지 두고두고 시끄러울 것 같다.특히 친박 복당파 국회의원과 친이계 원외 당협위원장이 나란히 버티고 있는 지역구는 더더욱 그렇다.친박 복당파는 지난해 총선에서 당 공천심사에서 떨어지고도 ‘박근혜 브랜드’로 국회에 입성한 현역의원들이다.원외 당협위원장은 한나라당 공천을 받고도 ‘박풍(박근혜 바람)’에 의원 배지를 날린 이들이다.

이런 식으로 지역구 조직을 끼고 있는 원외 위원장과 ‘배지’를 단 현역의원이 경합하는 지역구는 총 18곳이다.별거 아닌 숫자인듯 하지만 지역구별로 가지를 치는 지방의원와 기초자치단체장 공천까지 생각하면 무시못할 숫자다.

한나라당은 친이-친박계 사이의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친박 복당파 현역의원 18명에게 당협위원장 자리를 내주기로 결정했다.일단 당내 갈등의 ‘큰 불’은 끌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년 지방선거 공천과 관련해 지역별로 타들어 갈 ‘잔불’은 어찌해야 할지 대책이 없는 상황이다.

특히 18곳 중 절반을 차지하는 대구•경북은 향후 지방선거 공천과정에서 내분으로 몸살을 앓을 가능성이 커졌다.새로 당협위원장을 맡게된 현역의원 입장에서는 지난 총선 때 기존 원외 당협위원장을 도왔던 지역구 지방의원들이 한마디로 ‘눈엣가시’가 아닐 수 없다.

공천파동으로 그 어느때보다 치열한 선거전을 치렀기에 마음 속에 앙금이 클 수 밖에 없다.그렇다고 이들을 내치고 자기 사람들로 전부 채우자니 “당의 명령에 따라 당을 지킨 것이 잘못이냐.공천 못받았다고 당 깨고 나간 게 누군데…”라는 비판을 받을까 두렵다.

친박계 현역의원들에게 위원장 자리를 내주게 된 원외 당협위원장들은 “공당에서 이런 일이 생겨서는 안된다”며 집단 행동에 나설 태세다.원외 당협위원장들의 요구사항은 “우리를 도왔던 시도의원과 시군구의원이 다음 공천 때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해달라”는 것이다.여론조사 방식의 공천자 선정 또는 해당 지역구는 중앙당에서 일괄 공천하는 방안 등이 제시됐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오가면서 당협위원장 교체를 계기로 쪼개진 한나라당이 화합하는 계기가 될 것이란 전망보다는 오히려 계파간 싸움이 더욱 치열해 질 것이란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대구지역의 한 현역의원은 “공천 헤게모니를 쉽게 내놓지 않으려는 친이계와 대구경북 현장을 장악한 친박계 사이에 치열한 물밑 힘겨루기가 예상된다”며 “풀뿌리 정치마저 중앙 정치의 그늘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씁쓸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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