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 · 서민층과 중소기업에 대한 비과세 · 감면을 계속하라'는 한나라당의 요구를 기획재정부가 받아들였다. 전체 비과세 · 감면의 80% 이상이 서민 중소기업 지원에 해당돼 세수 감소에 대비 비과세 감면을 대대적으로 정비한다는 정부의 계획은 결국 '물거품'이 됐다는 지적이다.

윤영선 재정부 세제실장은 24일 KBS 라디오에 나와 "올해 말로 일몰기한이 도래하는 87개 비과세 · 감면 대상 중에서 중산 · 서민층에 대한 배려는 지속하고 담세력이 있는 고소득자와 대법인을 중심으로 축소하겠다"고 밝혔다. 전날 '고소득층과 대기업에 대한 지원부터 우선해서 축소하라'는 한나라당의 권고를 수용한 것이다. 표를 의식한 일부 여당 의원들이 대중영합적인 주장을 하고 이걸 한나라당 정책위원회나 정부가 거르지 않고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국회에 보고한 2008년 조세감면액 통계에 따르면 비과세 · 감면 중 57.3%가 근로자 농어민 등 중산서민층 지원에 쓰였다. 투자 R&D 등 기업 지원에서 중소기업이 차지하는 몫까지 감안하면 80% 이상이 서민층과 중소기업에 비과세 감면 혜택이 돌아가고 있다는 분석이다. 서민층 중소기업 지원이 비과세 감면의 대부분인데 이걸 빼놓고 하라니 정부 실무자들은 난감하다는 반응이다.

당초 재정부는 현재 시행 중인 비과세 · 감면제도를 대폭 정비하려 했다. '어떤 것을 없앨까'를 고르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놓고 '남겨야 할 이유를 설명하라'고 각 부처에 요구할 생각이었다. 재정부 관계자는 그러나 "지금으로선 어떤 게 대기업과 고소득층에 혜택이 돌아가는 제도인지 딱 잘라 말하기 어렵지만 원칙이 정해졌으니 그렇게 가야 하지 않겠느냐"며 "올해 말 일몰 도래하는 제도에서부터 하나하나 다시 세제혜택의 귀속 대상을 면밀히 분석하는 작업을 시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비과세 감면 정비 논의가 본질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지적이다. 박형수 조세연구원 재정분석센터장은 "취약계층에 대한 세제지원은 예산 지출로 하기가 여의치 않을 때 쓰는 보조 수단"이라며 "복지예산이 넉넉하게 늘어난 만큼 중복적으로 적용되는 비과세 감면은 털고 가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예컨대 장애기초연금을 도입하면서 장애인 인적소득공제는 줄이는 방식이다.

하지만 정부 여당의 계획대로라면 이와는 거꾸로 가는 상황이 예상된다. 표면상 대기업에 대한 지원으로 나타나는 제도부터 없애라고 요구할 경우 '임시투자세액공제'처럼 일자리 창출 효과가 확실하고 중복적인 예산지원이 없는 비과세 · 감면부터 축소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재정건전성 개선 노력도 물건너 갈 공산이 크다. 2008년 기준으로 각종 비과세 · 감면을 통한 세제지원 금액은 총 29조6321억원이다. 지난해 세제개편으로 2012년까지의 누적 세입 감소분(25조5000억원)을 충분히 벌충하고도 남는 금액이다. 고영선 한국개발연구원(KDI) 재정사회정책연구부장은 "선진국들은 각종 세율 인하와 비과세 · 감면 축소를 동시에 추진했지만 한국은 감세만 했다"며 "모든 분야를 대상으로 비과세 · 감면을 원칙적으로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차기현/박신영 기자 khc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