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산행 보도후 수천만원 빚 탕감…오뚝이처럼 일어나 꼭 보답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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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희망 등반대' 그 후 6개월
지난 19일 오전 관악산 등산로 입구로 향하는 기자들의 마음속에는 걱정과 설렘이 교차했다. 꼭 6개월 만의 만남이었다. 지난해 12월 노숙인 쉼터인 '내일을 여는 집'에서 재활을 다지는 5명과 함께 '희망 등반대'라는 이름으로 지리산 천황봉을 올랐던 기억이 엊그제 같다. 2박3일짜리 힘든 종주를 하며 재기를 다짐하던 희망찬 얼굴이 아직도 그대로일지,아니면 다시 좌절로 얼룩졌을지 온갖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서울대 정문 근처에 있는 등산로 주차장에서 내여집 사람들을 만났다. 제일 먼저 고길연씨(45)의 얼굴이 보였다. 양계사업을 하던 중 조류독감으로 닭 35만마리를 땅에 묻고 술을 먹기 시작했던 그였지만 이젠 더 이상 실패한 사업가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축구와 배드민턴 등 꾸준한 운동으로 지난 12월보다 살이 7㎏이나 빠져 혈색도 좋아보였다.
고씨 뒤로 박정일씨(28)가 눈에 보였다. 박씨가 그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지리산에 오를 때만 해도 박씨는 앞니 5개가 없었다. 인천의 한 조직(?)에 몸담았다가 생각을 고쳐먹고 빠져나오면서 치러야했던 대가였다. 다행히 희망등반대 기사를 본 한 치과의사의 도움으로 지금은 깨끗하고 고른 치아가 생겼다. 박정일씨를 아들처럼 아끼는 고길연씨는 옆에서 귓속말로 "정일이가 요즘 자주 웃는다"며 "예전에는 하루 종일 말 한마디 듣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농담도 곧잘 한다"고 말했다.
이칠성씨(44) 모습도 보였다. 페인트 기술자인 그는 아직도 건설경기가 안 좋아 전공을 제대로 살리고 있진 못하지만 지금까지 술을 끊고 살고 있는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느낀다며 근황을 전했다.
중국집 주방장 출신이었던 조성구씨와 목회활동을 했던 문용산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들을 이끌고 지리산에 함께 올랐던 내여집의 김철희 목사(39)는 "두 사람 모두 지난 봄에 내여집에서 독립했다"고 했다. 세상살이가 쉽지 않아 여전히 힘들어하지만 둘다 헤쳐나가려고 무던히도 애쓰고 있다는 말도 전했다.
관악산을 오르기 시작하자 지리산의 추억이 새삼 떠올랐다. "그때 무슨 생각으로 도전한 건지 모르겠다" "모르니까 덤벼든거지.다시 하라면 못할 것 같아" 등의 얘기에 모두 웃음을 한모금씩 머금었다.
고르던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한 시간쯤 오르니 약수터가 보였다. 물도 마실 겸 다들 바위 하나씩 차고 앉아 흐르는 땀을 닦았다.
다시 정상으로 걸음을 떼면서 그동안 말이 없던 이칠성씨가 자꾸 어깨를 주물렀다. 어디 불편하냐고 묻자 "알콜 금단 증상이라서 병원을 가봤는데 겉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더라"며 "이렇게 땀흘리며 운동하다보면 언젠가 괜찮아질 것"이라고 의연한 웃음을 보였다.
약수터를 떠난 지 한 시간만에 관악산 정상에 해당하는 연주대가 보였다. 정상에 가까워올수록 산세가 험해진 탓에 다들 조금씩 지친 기색이 엿보였다. 일행 중엔 고길연씨가 가장 멀쩡했다. 숨찬 기색도 없었다. 그는 "살도 빠지고 마음도 가벼워져서 그렇다"고 말했다. 사실 고길연씨는 희망등반대의 보도가 나간 뒤 채권자들로부터 수천만원의 채무 탕감을 받았다.
고씨는 4억원이 넘던 빚을 성실하게 갚아온 데다 지리산 등정을 통해 보여준 '진정성'으로 다시 지인들의 믿음을 얻었다고 말했다. 원래 말이 없는 박정일씨는 정상에 도착한 기념으로 앞으로의 포부를 밝혀보라는 고길연씨의 말에 겨우 입을 열었다. 고등학교 중퇴인 그는 검정고시를 준비 중이라고 한다.
내려오는 길에는 그동안 말을 아끼던 김 목사가 이야기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김 목사는 내여집의 근황을 알리면서 "경기가 어려워서 그런지 예년보다 수용 인구가 더 늘었다"며 "정부가 실시하는 희망근로의 경우 일자리 수는 제법 많은데 보다 양질의 일자리가 늘어야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산을 내려와서 늦은 점심을 함께했다. 술 대신 탄산음료로 잔을 주고 받았다. 식당을 나와 작별 인사를 하면서 올 가을에 다시 산행을 하기로 약속했다. 서로 다음에 만날 때 좋은 소식을 들려주면 좋겠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간절히 원하는 마음은 입밖에 꺼내지 않아도 아는 법이다.
관악산=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