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여기 보세요. 개수대가 식탁을 향해 있죠.어머니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면서도 가족과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얘기를 나눌 수 있도록 만든 것입니다. "

지난 28일 인천 부평동 부평시장 인근의 '신현e-편한세상 · 하늘채' 모델하우스.김선아 주미기획 실장(39)의 설명에 한 고객이 신기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대체로 청약이 끝나면 계약 때까지 모델하우스는 한산해진다. 청약 전만 해도 이곳은 하루 평균 3000여명이 찾아와 북새통을 이뤘다. 하지만 지금은 뒤늦게 찾아와 둘러보는 고객들만이 간간이 눈에 띈다. 주로 40~50대 주부인 이들 곁에는 항상 분양 도우미들이 따라 다닌다. 밝은 미소를 만면에 머금고 분양할 아파트 단지의 입지와 각종 시설 배치,아파트의 평면구조 등을 열심히 설명해준다. 여기서 활약하는 도우미는 총 20명.이들을 교육 · 감독하고 도우미의 업무를 총괄하는 책임자가 바로 김 실장이다.

김 실장은 분양 도우미 경력만 10년이 넘는 베테랑이다. 서울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 1~3차를 비롯해 용산구 이촌동 파크타워,서초구 반포동 래미안퍼스티지 등 유명 단지의 모델하우스 분양을 도맡아 했다. 삼성물산 대림산업 등 대형 건설사가 진행하는 프로젝트마다 그의 이름이 빠지는 법이 없다. "분양 도우미가 대부분 임시직이다 보니 인사 관리가 제대로 안 되는 경우가 많은데 김 실장은 오랜 경험과 특유의 '악바리 정신'으로 일처리가 깔끔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김신조 내외주건 대표)고 한다. 모델하우스에서 김 실장을 만났다.

▼어떻게 이 일을 시작하게 됐나요.

"1992년 삼성건설(삼성물산 건설부문의 전신)에서 모델하우스 전문 홍보요원을 대졸 공채로 뽑은 적이 있어요. 당시 졸업을 앞두고 있었는데 신문 광고에 나온 전문직 커리어 여성의 이미지가 마음에 들어 곧바로 지원했죠.그때만 해도 지금과 같은 분양 도우미가 없었거든요. 10명 모집에 수천명이 몰려 경쟁률이 수백 대 1을 넘었는데 운좋게도 합격했지요. 그 뒤 7년간 전국의 분양 현장을 뛰어다니며 신발 정리부터 계약 상담에 이르기까지 분양 마케팅의 ABC를 배웠죠.모델하우스 현장에서 고용한 대학생 아르바이트를 교육 · 관리하는 업무도 맡았고요. "

▼외환위기 이후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었을 때는 힘들지 않았습니까.

"회사에서 딱히 나가라고 말은 안 했지만 은근히 눈치를 주는 거예요. 바로 사표를 썼죠.집에서 놀고 있는데 회사에서 타워팰리스를 분양한다며 임시직이지만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일단 분양팀에 들어가서 일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나도 한번 사업을 해보자며 아예 기획사를 차렸습니다. "

▼타워팰리스 분양 때는 워낙 관심들이 많았는데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요.

"당시에는 경기가 좋지 않아 타워팰리스도 미분양이 많았어요. 공사 현장에서 칼국수집을 하던 아저씨가 하루는 이제 회사 식권을 못받게 됐다며 걱정을 하시더라고요. 미분양이 많아서 자금 사정이 나빠지자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주던 칼국수집 공짜 식권을 폐지한 것이죠.그때 제가 은근슬쩍 여기 미분양 하나 잡아두면 회사에서도 식권 영업을 계속 하게 해주지 않겠느냐고 귀띔했더니 바로 계약을 하셨죠.식권 때문에 산 아파트가 나중에 황금알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호호호."

외환위기 직후부터 3차에 걸쳐 분양한 타워팰리스는 강남 부촌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김 실장은 미분양이 많아 6개월 이상 분양 마케팅을 펼쳤던 1차 단지는 물론 이후 3차까지 모두 분양 도우미 매니징 업무를 맡았다. 원래 2차 때부터 다른 매니저가 맡기로 돼 있었으나 갑자기 김 실장으로 바뀐 데에는 사연이 있었다고 한다.

▼그 사연이 뭡니까.

"타워팰리스는 1차 분양 때 VIP들한테 사전예약제로 마케팅을 했어요. 따라서 예약을 하지 않으면 모델하우스에 들어올 수조차 없었죠.그런데 하루는 60대 노인 한 분이 두 아들과 함께 청계산에 등산을 갔다 오는 길에 들렀는데 예약을 하지 않아 쫓겨날 처지였어요. 그때 제가 사전예약제의 원칙을 설명해 드리는 대신 그분이 헛걸음 하시지 않도록 잠깐 모델하우스를 둘러볼 수 있도록 했어요. 그런데 그분이 모 그룹의 대표이사였던 거예요. 그분이 2차 분양을 맡았던 삼성중공업의 사장님한테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시는 바람에 2차는 물론 3차까지 제가 맡은 거죠."

▼김 실장님도 그때 많은 걸 느꼈겠군요.

"타워팰리스 분양 경험이 제겐 큰 자산이 됐죠.타워팰리스를 하고 나니 여기 저기서 연락이 왔어요. 특히 대구에서 최고급 아파트로 분양한 '태왕 아너스'에서는 아무 연고도 없는 저를 굳이 쓰고 싶다고 해서 대형 버스를 전세내 도우미들을 데리고 대구까지 왔다갔다 하기도 했죠."

▼삼성물산이나 대림산업 등 주로 대형 업체를 맡는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많으면 한 달에 5~6곳까지 의뢰가 들어와요. 그러나 저는 절대 여러 현장을 한꺼번에 맡지 않아요. 자칫하면 관리가 소홀해질 수 있거든요. 모델하우스 개관일부터 청약일까지의 기간이 겹치지 않도록 한두 곳만 합니다. 예전에 삼성물산에서 일했던 인연으로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 많아 경기와 상관없이 일거리는 꾸준한 편입니다. "

▼고객으로부터 인정받는 비결이 뭔가요.

"저는 가장 잘 하는 일이 뭐냐고 누가 물으면 '신발 정리'라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고객이 벗어 놓은 신발을 그냥 손으로 집어 흙을 툭툭 털어주기도 해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고객에게 감사한 마음에서 그렇게 해드리고 싶더라고요. 주말도 없이 매일같이 현장에 나오지만 일 자체가 너무 재미있고 행복해요. 직원들도 대부분 임시직이지만 저의 이런 모습에 군말없이 따라주는 편입니다. 사실 제가 한번 화나면 무섭기도 하고요. (웃음)"

김 실장은 직원들에게 '호랑이 매니저'로 통한다. 그런데도 직원들이 김 실장을 따르는 것은 원칙을 지키고 솔선수범하는 태도 때문이다. 한 직원은 김 실장에 대해 "맺고 끊음이 분명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였나요.

"분양 도우미란 직업이 을(乙) 중의 을이다 보니 분양 대행사나 건설사로부터 부당한 요구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자존심 하나로 버텼지만 사실 영업 초기에는 쉽지 않았죠.물론 최근에는 그런 관행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지만 지금도 저는 직원들에게 저 없이는 절대 저녁자리에도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합니다. "

▼주말에도 쉴 틈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일하니까 돈도 많이 벌겠네요.

"제가 직접 돈 관리를 하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매달 분양 현장 한두 곳을 뛰다보면 직원 월급이나 각종 운영비를 빼고도 한 1000만원 정도 남는 것 같아요. 그럼 저도 억대 연봉자인가요,호호."

▼모델하우스에 오는 고객은 대부분 주부들인데 왜 남자 도우미는 없을까요.

"여성이 남성에 비해 디테일에 강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요즘 주부들의 까다로운 입맛에 맞추려면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브리핑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섬세한 여성이 유리하죠.또 복잡한 모델하우스 현장의 특성상 주목도가 뛰어나야 하는데 키가 크고 용모가 단정한 여성이 눈에 쉽게 띄게 마련이죠."

▼이제 척 보면 잘 될 아파트인지 아닌지 알겠네요.

"그렇지도 않아요. 기억력이 나빠서 몇 달만 지나면 예전에 맡았던 아파트 단지의 가구 수조차 생각이 잘 안 나요. 하지만 현장을 한번 맡으면 완전 집중해서 스스로한테 이곳이 전국에서 제일 좋은 아파트인 것처럼 최면을 걸어요. 보통 모델하우스 개관 전에 분양 도우미 교육만 3일 정도 하는데 저는 개관 당일 카탈로그만 쭉 훑어봐도 머릿속에 다 들어오더라고요. 그렇게 집중적으로 하고 나서 조금만 지나면 깨끗이 잊어버려요. "

▼후배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습니까.

"좀 더 책임감을 갖고 일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분양 도우미는 대부분 임시직이라 조금만 힘들면 그만두는 경우가 적지 않거든요. 얼굴에는 친절한 미소를 품되 가슴에는 독기를 품어야 해요. 임시직으로 시작해 정식 직원으로,매니저로 발전하려면 그만한 각오 없이는 힘들어요. 물론 영업하는 사람으로서 서비스 정신과 센스는 기본이죠."

글=이호기/사진=양윤모 기자 h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