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철 대법관의 재판개입 논란을 두고 전국 법원에서 판사회의가 잇따라 열려 다섯 번째 사법파동이 시작된 것이 아니냐는 시각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있다.

사법파동(司法波動)의 의미를 사전적으로 보면 사법부 구성원이 일으킨 큰 사회적 변동인데 역사적으로는 판사들이 법원의 독립성과 관련해 집단행동을 하고 이를 통해 일정한 변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해석돼왔다.

◇ 1∼4차 사법파동은 = 앞서 파동으로 분류된 4가지 사건은 권력의 침탈 위협에 판사들이 집단행동으로 맞서거나 법원 개혁을 요구하며 발생했다.

1971년 검찰이 현직 판사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하면서 첫 사법파동이 발생했다.

판사들은 이를 공안사건 무죄판결에 대한 보복으로 간주해 100여 명이 무더기로 사표를 제출, 파동이 권력의 사법부 흔들기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80년대 민주화 운동이 흐름을 거친 1988년 소장판사들이 대법원의 개혁과 반성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전국 법관이 단체로 서명에 참여한 것이 2차 파동이며, 이 때문에 김용철 대법원장이 조기 사퇴했다.

문민정부 출범 직후인 1993년 서울지법 민사단독 판사 40명이 과거 사법부의 잘못을 반성하고 같은 잘못이 반복되지 않게 진정한 개혁을 촉구하는 강도 높은 성명을 발표하면서 시작된 3차 파동을 거치면서 판사회의 제도가 만들어졌고 김덕주 대법원장이 사퇴했다.

가장 최근에 발생한 4차 파동의 경우 2003년 대법관 인선에 항의한 판사가 `대법관 제청에 관한 소장 법관들의 의견'이라는 글을 올리는 등 소장판사들이 대법원장에게 연판장을 제출해 집단 의사를 표명했다.

박시환 당시 서울지법 부장판사는 기수 중심의 인사 관행에 항의, 사표를 제출했고 대법원은 `전국 판사와의 대화' 형식으로 법관대표회의를 열었다.

이후 전효숙 서울고법 부장판사와 김영란 대전고법 부장판사가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각각 헌법재판관과 대법관이 됐다.

◇ 이번엔 5차 사법파동? = 과거 파동의 진행 경과를 보면 연판장을 비롯한 집단 의사 표출이나 사표 제출과 같은 강도 높은 대응이 판사들의 반발에 힘을 실어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진행되는 판사회의 참가자들은 신 대법관의 행위와 대법원의 대응이라는 공통의 이슈에 대해 `신 대법관의 행위가 재판상 독립의 침해이며 대법원의 조치가 미흡하다'는 점에서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

일부 차이가 있지만 신 대법관이 대법관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의견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어 사법부 독립성에 대한 위기의식이나 집단적 의사 표현이라는 큰 요건은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파동의 신호탄으로 여겨지던 연판장이나 집단 사표 등의 강경한 `카드'가 아직 사용되지 않았고, 과거처럼 법원 외부나 대법원장을 향한 것이라기보다 신 대법관 개인을 겨냥했다는 점에서 파동이라고 규정하기엔 무리라는 시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와 관련, 의사 표출 공간이 부족했던 옛 시절과 달리 법원 내부 전산망의 게시판이나 판사회의 같이 합법적인 공론장이 마련돼 있어 연판장 유무가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이 있다.

또 일련의 흐름이 사태를 촉발한 신 대법관을 겨냥한 것은 맞지만, 그 바닥에는 대법원장의 사후 처리 방식에 대한 불만이 자리하고, 판사 다수가 재판의 독립성 보장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사법파동으로 봐도 무방하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특히 판사회의가 열린 법원이나 참석자 수, 표출되는 의견의 분포를 감안하면 과거 어느 때보다 규모가 큰 움직임인 만큼 사법파동이 이미 시작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대한민국사'의 저자인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는 "단순히 연판장 유무나 신 대법관의 사퇴 여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며 "법관의 신분이 헌법으로 보장돼 있어 사퇴에 대한 발언 수위는 낮지만, 참여 정도로 보면 3ㆍ4차 파동 이상"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5차 사법파동이 시작됐는지를 놓고 아직 일치된 결론은 없다.

따라서 완결되지 않은 판사들의 향후 움직임과 신 대법관 및 대법원의 대응이 이번 사태를 5차 사법파동으로 역사에 남길 수 있을지를 가르는 잣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서울연합뉴스) 이세원 기자 sewonle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