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 '완장'이 힘을 쓰는 세상…맹목적 복종에 대한 '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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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희대의 사기극과 권위
김회은 <텍사스 A&M 대학 역사학과 교수>
김회은 <텍사스 A&M 대학 역사학과 교수>
영화 '범죄의 재구성'에서 구로동 샤론스톤(염정아)이 말했 듯이 사기는 테크닉이 아니라 심리전이다. 땀 흘림 없이 무언가를 얻으려는 인간의 탐욕과 그 탐욕을 역으로 이용해 한건하려는 시도가 치열하게 맞물린다는 점에서 사기행위는 고도의 심리 싸움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거짓을 진실보다 더 진실같이 보이게 만드는 사기의 세계에도 초보와 고수가 있는 법.고수들은 한 시대와 사회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감히 도전하거나 의심할 수 없는 가치와 권위를 내세우는데 탁월한 테크닉을 보인다.
영화에서 고수 최창혁(박신양)이 스승 김선생(백윤식)을 '수술'하는데 이용한 것은 부동산 불패신화라는 한국 사회의 굳건한 가치였으며,최근에 신문을 화려하게 장식한 '장군의 딸'이 휴대폰 문자메시지만으로 10여명의 현직 장교들에게서 2470만원을 갈취한 배경에는 한국 사회에서 군 장성이 가지는 권위가 숨어 있다.
이렇듯 사기꾼과 사기행위가 한 시대의 독특한 가치체계와 권위,사회구조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신문의 한 구석을 차지하는 사건 · 사고란은 역사학자들에게는 보물창고와 같다. 명문대생이나 의사를 사칭해서 부녀자를 농락한 사건이나 어두웠던 시절 안기부나 청와대를 사칭해서 금품을 갈취하는 행위들이 한국 사회의 가치구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처럼,20세기 초반 독일 사회를 강타한 희대의 사기사건은 1차대전으로 치달아가는 독일 사회의 단면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때는 1906년 10월16일.한 독일군 장교가 훈련을 마치고 병영으로 돌아가던 10명 남짓의 사병들을 베를린 시내의 모아빗(Moabit)역(서울로 치면 영등포역 정도)에서 불러세웠다. 잔뜩 얼어 있었을 이들 사병에게 장교는 모아빗에서 동남쪽으로 30㎞ 정도 떨어진 베를린 외곽의 작은 도시 쾨페닉 (Koepenick)-대략 영등포에서 성남 정도 거리다-으로 동행할 것을 명령했다. 장교의 명령이라면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훈련받은 사병들은 아무런 의심없이 기차에 동승,잠시 후 쾨페닉에 도착하게 된다.
일이 진지해지는 것은 바로 그때부터.장교는 쾨페닉에 온 이유가 빌헬름 황제의 특수 임무 때문이라며 사병들에게 쾨페닉 시청을 장악할 것을 명령했고 곧바로 시청에 있던 재정담당관과 시장을 공금횡령으로 체포했다. 공금은 다시 국고로 환속되어야 하는 법.장교는 그 자리에서 4000마르크나 되는 큰 돈을 압수하고 공금을 횡령한 재정담당관과 시장을 베를린 시내의 왕궁수비대로 압송할 것을 지시했다. 절반 정도의 사병이 그렇게 베를린으로 떠난 후 장교는 남은 사병들에게 시청을 30분간 엄호할 것을 명령한 뒤 그 자신은 황제가 하달한 다른 급한 볼일이 있다며 기차를 타고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일이 재미있어지는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던 베를린 경찰은 "아마도 내 감방 동기의 소행같다"는 제보를 받아 사건 발생 10일 후인 10월27일,57세의 전과범 빌헬름 보익트 (Wilhelm Voigt)를 구속하게 된다. 정의를 위해서 분연히 일어선 암행어사 같았던 독일군 장교는 실은 군대라고는 근처에도 가본적 없는 신발수선공이었다. 그는 베를린 시내의 헌 옷 가게를 돌며 모자,바지,군화 등 독일군 장교 복장을 하나하나 사모아서 장교를 사칭했던 것이다. 완전범죄로 끝났을지 몰랐던 보익트의 사기극은 절친한 친구의 배신으로 이렇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모든 언론에 대서특필된 보익트 사건을 접한 베를린 시민들의 첫 반응은 유쾌함이었다. 그들은 장교 복장을 입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반백의 중년 남성을 '아무 이유없이' 따라나선 젊은 군인들의 권위에 대한 맹종을 비웃었고 영문도 모른 채 왕궁수비대로 압송된 시장과 공무원의 우스꽝스러움에 열광했다. 당시 신문에 따르면 빌헬름 황제조차도 사회의 폐부를 찌르는 보익트의 날카로운 사기극에 갈채를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재판 과정을 통해서 보익트의 사연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그 유쾌함은 사회에 대한 씁쓸한 비판으로 빠르게 바뀌어갔다. 14세의 나이에 단순절도로 2주간 감옥살이를 했던 보익트는 이후 수표위조 같은 잡다한 범죄로 감옥을 드나들기 시작,1906년 당시 이미 인생의 절반에 가까운 25년을 감옥에서 보낸 베테랑 전과범이었다. 하지만 이런 보익트의 경력보다 베를린 시민을 경악시켰던 것은 수차례의 체포와 수감생활 동안 그가 제대로된 재판 한번 받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증인을 불러달라는 그의 요구는 수차례 무시되었고,심지어 그의 마지막 재판은 불과 20분 만에 끝나버렸다. 정직하게 살아보고자 생업인 신발제조 일을 열심히 해보려 했지만 전과자라는 사실이 밝혀진 후 보익트는 일을 찾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1906년 8월에는 베를린시에서 추방되기에 이른다. 독일군 장교를 사칭한 것은 사기꾼의 살아보겠다는 마지막 절규였다.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독일의 관료주의와 군국주의를 통렬하게 비웃었다는 괘씸죄로 12월1일 재판에서 4년형을 선고받은 보익트는 아이러니하게도 황제의 '은혜'를 입어 1908년 8월 특별사면으로 풀려나게 된다. 이후 독일 사회가 평탄한 발전을 겪었다면 보익트의 사기극은 하나의 에피소드로 잊혀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차대전의 발발과 이후 바이마르 시기의 민주정의 실패는 독일 사회의 특수성이라는 이름하에 보익트를 박제화시켰고,1930년 여름 독일의 유명한 극작가 칼 추크마이어 (Carl Zuckmayer)는《쾨페닉의 대위》라는 희곡으로 보익트의 사기극을 예술로 승화시킨다.
나치가 부상하는 정치적인 격변의 시대.추크마이어는 시대를 경고하는 의미로 《쾨페닉의 대위》를 쓰면서 보익트를 '당시 사회를 보여주는 작은 악마'라고 지칭했다. 앞으로 100년 후 후대의 역사가들은 2009년의 한국을 보면서 어떤 사기극에 관심을 가질지 궁금해진다.
하지만 거짓을 진실보다 더 진실같이 보이게 만드는 사기의 세계에도 초보와 고수가 있는 법.고수들은 한 시대와 사회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감히 도전하거나 의심할 수 없는 가치와 권위를 내세우는데 탁월한 테크닉을 보인다.
영화에서 고수 최창혁(박신양)이 스승 김선생(백윤식)을 '수술'하는데 이용한 것은 부동산 불패신화라는 한국 사회의 굳건한 가치였으며,최근에 신문을 화려하게 장식한 '장군의 딸'이 휴대폰 문자메시지만으로 10여명의 현직 장교들에게서 2470만원을 갈취한 배경에는 한국 사회에서 군 장성이 가지는 권위가 숨어 있다.
이렇듯 사기꾼과 사기행위가 한 시대의 독특한 가치체계와 권위,사회구조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신문의 한 구석을 차지하는 사건 · 사고란은 역사학자들에게는 보물창고와 같다. 명문대생이나 의사를 사칭해서 부녀자를 농락한 사건이나 어두웠던 시절 안기부나 청와대를 사칭해서 금품을 갈취하는 행위들이 한국 사회의 가치구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처럼,20세기 초반 독일 사회를 강타한 희대의 사기사건은 1차대전으로 치달아가는 독일 사회의 단면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때는 1906년 10월16일.한 독일군 장교가 훈련을 마치고 병영으로 돌아가던 10명 남짓의 사병들을 베를린 시내의 모아빗(Moabit)역(서울로 치면 영등포역 정도)에서 불러세웠다. 잔뜩 얼어 있었을 이들 사병에게 장교는 모아빗에서 동남쪽으로 30㎞ 정도 떨어진 베를린 외곽의 작은 도시 쾨페닉 (Koepenick)-대략 영등포에서 성남 정도 거리다-으로 동행할 것을 명령했다. 장교의 명령이라면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훈련받은 사병들은 아무런 의심없이 기차에 동승,잠시 후 쾨페닉에 도착하게 된다.
일이 진지해지는 것은 바로 그때부터.장교는 쾨페닉에 온 이유가 빌헬름 황제의 특수 임무 때문이라며 사병들에게 쾨페닉 시청을 장악할 것을 명령했고 곧바로 시청에 있던 재정담당관과 시장을 공금횡령으로 체포했다. 공금은 다시 국고로 환속되어야 하는 법.장교는 그 자리에서 4000마르크나 되는 큰 돈을 압수하고 공금을 횡령한 재정담당관과 시장을 베를린 시내의 왕궁수비대로 압송할 것을 지시했다. 절반 정도의 사병이 그렇게 베를린으로 떠난 후 장교는 남은 사병들에게 시청을 30분간 엄호할 것을 명령한 뒤 그 자신은 황제가 하달한 다른 급한 볼일이 있다며 기차를 타고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일이 재미있어지는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던 베를린 경찰은 "아마도 내 감방 동기의 소행같다"는 제보를 받아 사건 발생 10일 후인 10월27일,57세의 전과범 빌헬름 보익트 (Wilhelm Voigt)를 구속하게 된다. 정의를 위해서 분연히 일어선 암행어사 같았던 독일군 장교는 실은 군대라고는 근처에도 가본적 없는 신발수선공이었다. 그는 베를린 시내의 헌 옷 가게를 돌며 모자,바지,군화 등 독일군 장교 복장을 하나하나 사모아서 장교를 사칭했던 것이다. 완전범죄로 끝났을지 몰랐던 보익트의 사기극은 절친한 친구의 배신으로 이렇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모든 언론에 대서특필된 보익트 사건을 접한 베를린 시민들의 첫 반응은 유쾌함이었다. 그들은 장교 복장을 입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반백의 중년 남성을 '아무 이유없이' 따라나선 젊은 군인들의 권위에 대한 맹종을 비웃었고 영문도 모른 채 왕궁수비대로 압송된 시장과 공무원의 우스꽝스러움에 열광했다. 당시 신문에 따르면 빌헬름 황제조차도 사회의 폐부를 찌르는 보익트의 날카로운 사기극에 갈채를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재판 과정을 통해서 보익트의 사연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그 유쾌함은 사회에 대한 씁쓸한 비판으로 빠르게 바뀌어갔다. 14세의 나이에 단순절도로 2주간 감옥살이를 했던 보익트는 이후 수표위조 같은 잡다한 범죄로 감옥을 드나들기 시작,1906년 당시 이미 인생의 절반에 가까운 25년을 감옥에서 보낸 베테랑 전과범이었다. 하지만 이런 보익트의 경력보다 베를린 시민을 경악시켰던 것은 수차례의 체포와 수감생활 동안 그가 제대로된 재판 한번 받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증인을 불러달라는 그의 요구는 수차례 무시되었고,심지어 그의 마지막 재판은 불과 20분 만에 끝나버렸다. 정직하게 살아보고자 생업인 신발제조 일을 열심히 해보려 했지만 전과자라는 사실이 밝혀진 후 보익트는 일을 찾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1906년 8월에는 베를린시에서 추방되기에 이른다. 독일군 장교를 사칭한 것은 사기꾼의 살아보겠다는 마지막 절규였다.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독일의 관료주의와 군국주의를 통렬하게 비웃었다는 괘씸죄로 12월1일 재판에서 4년형을 선고받은 보익트는 아이러니하게도 황제의 '은혜'를 입어 1908년 8월 특별사면으로 풀려나게 된다. 이후 독일 사회가 평탄한 발전을 겪었다면 보익트의 사기극은 하나의 에피소드로 잊혀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차대전의 발발과 이후 바이마르 시기의 민주정의 실패는 독일 사회의 특수성이라는 이름하에 보익트를 박제화시켰고,1930년 여름 독일의 유명한 극작가 칼 추크마이어 (Carl Zuckmayer)는《쾨페닉의 대위》라는 희곡으로 보익트의 사기극을 예술로 승화시킨다.
나치가 부상하는 정치적인 격변의 시대.추크마이어는 시대를 경고하는 의미로 《쾨페닉의 대위》를 쓰면서 보익트를 '당시 사회를 보여주는 작은 악마'라고 지칭했다. 앞으로 100년 후 후대의 역사가들은 2009년의 한국을 보면서 어떤 사기극에 관심을 가질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