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과 공기업 등의 외화 조달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정부가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 발행으로 30억달러나 조달한 마당에 곧바로 은행과 공기업이 대규모 외화 조달에 나선다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현재 대규모 외화 조달을 추진하고 있는 곳은 기업은행과 코레일(철도공사).기업은행은 조만간 5억~10억달러 규모의 외화표시채권을 발행한다는 계획이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지난 2월부터 준비해 왔으며 시장 상황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코레일 역시 이달 안에 5억~10억달러 규모의 외화채권을 내놓다는 생각이다. 여기에 수출입은행도 상반기 중 30억달러 규모의 외화를 모집한다는 구상이며 산업은행도 일본 시장에서 엔화표시채권을 내놓을지 여부를 검토 중이다.

이에 대해 국제금융시장 동향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미국 등지의 투자자들이 한국물에 대해 약간의 피로를 느낀다는 얘기가 들려오고 있다"며 경계감을 표시했다. 최근 20여일 동안 한국 기업과 정부가 채권 발행을 통해 조달한 외화는 모두 47억달러에 이른다. 포스코가 지난달 19일 뉴욕에서 7억달러,하나은행이 지난 2일 정부 지급 보증 채권으로 10억달러,정부가 지난 9일 외평채로 30억달러를 조달했다. 여기에 SK텔레콤이 발행한 3억3000만달러 규모의 교환사채(발행 회사가 갖고 있는 다른 회사 주식과 교환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 채권),은행들의 사모 차입 등을 합치면 조달 규모가 60억달러를 웃돈다.

한 외국계 은행 관계자는 "한국물이 쏟아지면 외국 투자자 입장에서는 가산금리 상향 조정을 요구하는 게 당연하고 이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외면할 수밖에 없다"며 "외평채 발행 직후 줄줄이 나갈 것이 아니라 교통정리를 해서 2~3주 정도 여유를 두고 해외 채권 발행을 모색하는 게 좋아 보인다"고 말했다. 글로벌 투자자들의 경우 국가별 연간 투자한도가 정해져 있어 한국물이 새로 나오면 기존 보유 물량을 덜어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금리 상승(채권가격 하락)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월스트리트저널도 최근 '한국의 외채 중독(Korea's Debt Junkies)'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한국 기업들이 향후 9개월 동안 200억달러에 달하는 채권 발행을 준비 중이라며 글로벌 마켓에서 한국물의 공급 과잉 가능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이 같은 외화 조달 속도조절론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최봉식 산업은행 국제금융실장은 "지금까지 국제금융시장이 닫혀 있다가 최근 들어 조금 열린 상황"이라며 "조만간 유럽계 은행의 1분기 실적 발표 등 여러 가지 재료에 따라 언제 다시 국제금융시장 경색 현상이 심화할지 알 수 없는 만큼 조달할 수 있을 때 조달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또 유통시장에서 한국물의 가격이 오르는 등 평가가 좋아 지금이 적기라는 분석도 있다. 실제 수출입은행과 산업은행이 연초 발행한 5년 만기 외화표시채권의 경우 가산금리가 당초 615~625bp(1bp=0.01%포인트)에서 최근 470bp 수준까지 떨어졌으며 하나은행의 3년짜리 글로벌채권 가산금리 역시 490bp에서 420bp로 70bp나 하락(채권가격은 상승)했다.

박준동 기자 jdpow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