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강화도 고려산에서 큰 산불이 난 적이 있었다. 산불은 가까스로 진압됐지만 그 자리에 살던 나무들은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주인이 없어진 빈 자리를 하나 둘 생명력 강한 진달래가 채워 갔다. 그렇게 퍼져 나간 진달래가 이제는 고려산 산자락을 가득 덮고 봄의 주인으로서 그 위세를 뽐내게 됐으니,자연이 만들어 낸 오묘한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진달래꽃 하나 하나는 수줍은 소녀의 볼에 맺힌 엷은 홍조 같은 소박하고 은은한 맛이 있지만,모이면 달라진다. 산자락 빽빽하게 차오른 분홍빛 꽃의 요염한 물결은 상춘객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기에 충분하다.

고려산 진달래 군락지로 가는 경로 중 가장 대중적이고 산행 시간이 짧은 건 백련사 코스다. 상춘객 대부분은 백련사를 거쳐 진달래를 감상한 뒤 갔던 길을 되짚어 내려오는 이 코스를 택한다. 버스 정류장에서 하차하거나 고인돌 광장에 차를 세우고 포장 도로를 따라 쉬엄쉬엄 30분 정도 걸어가면 백련사가 나온다. 고려산에 인파가 몰리지 않는 시기에는 백련사 부근까지 차로 올라가는 사람도 많지만,진달래가 피는 기간에는 차량을 통제하기 때문에 걸어가야 한다.

백련사 옆에 바로 진달래 군락지로 올라갈 수 있는 200m가량 되는 좁은 산길이 있다. 길은 그다지 길지 않고 험하지도 않지만,어느 정도 경사가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진달래가 절정에 이르면 산자락 전체가 분홍빛으로 뒤덮이는데,그 모습은 상춘객들의 시선을 한참 동안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등산로에 설치된 나무 다리를 따라 걸으면 여러 각도에서 풍광을 조망할 수 있다.

정상 부근에는 고려산에 세워진 사찰 백련사,청련사,적석사 등의 유래에 얽힌 이야기를 간직한 작은 연못이 있다. 원래 고려산의 이름은 오련산이었는데,이는 인도에서 온 천축 조사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고구려 장수왕 시절 인도의 천축 조사는 고려산 정상 연못에 피어 있는 다섯 가지 색깔의 연꽃을 발견하고 허공으로 날려 보냈다. 흰 연꽃이 떨어진 곳에는 백련사,붉은 연꽃이 떨어진 곳에는 적석사,푸른 연꽃이 떨어진 곳에는 청련사,황색 연꽃은 황련사,검은 연꽃은 흑련사를 세웠다고 한다.

또 다른 코스는 적석사에서 시작하는 등산로다. 백련사에서 시작하는 코스에 비해 진달래 군락지까지 더 많이 걸어야 하지만 길이 험하지 않아 산행을 즐기는 나들이객에게는 괜찮다. 이 경로를 택하면 진달래 군락지를 볼 수 있는 고려산 정상까지 한 시간 정도 소요된다.

원래대로라면 적석사는 이름이 적련사가 되어야 맞지만,그 명칭이 잦은 화재 발생과 연관이 있다 하여 지금의 이름을 받게 됐다. 적석사를 지나 산길을 걸어가다 보면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된 강화 고천리 고인돌군도 볼 수 있다. 무너져 원형이 훼손되긴 했지만 잠깐 멈추어 서서 동반한 자녀에게 고인돌에 대한 설명을 해 주는 건 어떨까. 고인돌을 지나 좀 더 걷다 보면 드디어 진달래꽃이 펼쳐진다.

일몰을 즐기고 싶다면 적석사 방향으로 하산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저녁에 적석사 낙조대에서 해수관음보살상을 등지고 서면 서해를 붉게 물들이며 떨어지는 해가 보인다. 햇살 아래에서는 진달래를 즐기고, 햇살이 사라질 때는 일몰을 보고 싶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명소다. 하지만 늦은 시간에 산길을 오래 걷는 일도 위험하니 이동 시간을 잘 계산해 움직이는 게 좋다. 강화군청은 고려산 진달래가 오는 15~20일께 만개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번 주말엔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