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중동 지방에 살았던 인류는 열량과 무기질,비타민 같은 영양소가 풍부한 야생 포도를 여러 가지 형태로 섭취했다. 신선한 상태로 먹거나 즙을 내 마시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오랫동안 상하지 않고 운반이 간편하도록 말려서 비상식량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특히 포도즙이 발효되면 감미로운 맛과 향을 낸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의도적으로 으깬 포도즙을 용기에 담아 보관했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진 와인은 쉽게 산화됐으므로,가을철 아주 짧은 기간에만 맛볼 수 있는 매우 귀한 존재였다. 따라서 제철이 아니라도 언제나 와인을 마실 수 있도록 오래 보관이 가능한 밀폐용기의 존재가 절실했다.

초기 와인 생산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고대 이집트에서는 점토로 만든 목이 좁은 토기에 와인을 담고 입구를 진흙으로 철저히 봉해 공기의 유입을 차단했다. 그러나 토기에 있는 미세한 구멍을 통해 공기가 유입되기 때문에 와인을 오래 보관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편 본격적으로 와인을 생산하고 수출했던 그리스인들은 운송하기에 편하도록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암포라'(Amphorae)라는 용기를 만들어 사용했다. 이들은 작은 구멍을 막기 위해 용기의 안쪽에 올리브 오일이나 송진을 발랐다. 특히 송진은 방부제 효과가 있었으며,향도 크게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암포라'는 깨지기 쉽고 무겁다는 단점이 있다. 비록 메소포타미아시대 바빌론에서 야자나무로 큰 통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실생활에서 나무통을 대량 운송과 저장용기로 활발하게 사용한 사람들은 철기시대 북부 유럽에 살았던 켈트족(Celtic)이다.

실제로 큰 술통이라는 뜻의 영어 톤(tun)은 프랑스어로 토너(tonneau)와 같은 어원으로,모두 켈트(셀틱)어에서 유래했다. 한편 오크나무로 만든 통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AD 1세기 중반 로마시대부터지만,중간 부분이 둥글게 부풀어 오른 바렐(barrel)이라는 오크통은 프랑스인들이 가장 먼저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 와인 제조과정에서 나무통의 역할은 더 이상 와인을 오래 보관하거나 운송에 편리한 용기의 차원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많은 레드 와인과 일부 화이트 와인은 발효 후에도 상당 기간 나무통 속에서 숙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종류에 따라서는 발효 자체도 통 속에서 진행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통을 만드는 데 쓰이는 나무의 성격에 따라서 와인 속성도 크게 달라진다. 한마디로 나무는 막 발효된 와인의 거친 질감을 부드럽게 하며,맛의 깊이를 더할 뿐 아니라 오묘하고 강렬한 향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

나무통 제작에는 참나무과의 오크나무가 가장 많이 사용된다. 그러나 국가나 지역에 따라서 벚나무,호두나무,밤나무,소나무,아카시아나무,삼나무(redwood) 등으로 만든 통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밤나무는 나무 조직의 입자가 커서 증발되는 와인이 너무 많으며 타닌이 강해 쓴 맛이 도는 단점이 있는가 하면,아카시아는 와인에 노란색을 띄게 하는 문제점이 있다. 이들에 비해 오크통은 나무 조직의 입자가 조밀할 뿐 아니라 특징적인 바닐라 향이나 코코넛,구운 설탕,그리고 담배같이 독특하고 오묘한 향을 와인에 전해준다. 물론 레드 와인의 경우에는 부족한 타닌 성분을 적절하게 보충해주는 역할도 한다.

한편 숙성 과정 중에는 통 속의 와인으로부터 나무 조직의 구멍이나 널판지 사이로 수분이나 알코올 등이 증발돼 공기 중으로 빠져 나간다. 증발로 생긴 빈 공간은 아주 천천히 공기로 채워지면서 미세하게 와인은 산화된다. 이때 와인의 떫은 맛은 순화되고 색도 부드러워진다. 그러나 지나치게 산화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빈 공간은 다른 와인으로 빠르게 채워진다. 물론 습도,온도 같은 숙성 환경에 따라 차이가 많지만,일반적으로 와인의 경우에는 매년 2% 정도가 증발한다. 알코올 도수가 매우 높은 위스키는 첫해 8~10%,이듬해부터는 매년 4~5% 정도가 빠져 나간다. 따라서 8년 이상 숙성된 위스키의 경우 대략 30% 이상이 공기 중으로 증발해 없어진다.

서양에서는 이 모든 과정을 천사들이 주관한다고 믿으며,공기 중으로 사라진 와인을 '천사의 몫'(Angel's Share)이라고 재미있게 표현한다. 그러나 자비로운 천사는,가져간 와인에 대한 보답으로 남은 와인에 훨씬 더 다양하고 감미로운 향과 맛을 선물해 준다.



/와인 칼럼니스트 · 여유공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