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제품은 고급화로 뛰어넘어…내달 중국공장, 세계시장 노려
1970년대 서민들이 즐겨 입었던 옷의 소재는 어김없이 나일론 또는 폴리에스터였다. 면이나 실크에 비해 질긴 데다 값도 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 소재는 정전기에 취약한 게 단점이었다. 따뜻한 스웨터를 입기 위해서는 정전기 특유의 찌릿함을 '통과의례'로 삼아야 했고,정전기로 인해 치마가 나일론 스타킹에 달라붙어 맵시가 나지 않는 것을 '각선미를 뽐내는 것에 대한 대가'로 여겨야만 했다.
지긋지긋한 정전기로부터 한국인이 해방되기 시작한 기점은 1978년이었다. 국내 최초 섬유 유연제인 '피죤'이 바로 그해 탄생했기 때문.피죤은 P&G 등 글로벌 기업과 LG생활건강 등 국내 대기업들의 파상공세에도 불구하고 지난 30여년간 섬유 유연제 시장의 '지존' 자리를 지켰고,지금도 50%가 넘는 시장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피죤한다'는 말이 '빨래할 때 섬유 유연제를 넣고 헹군다'를 뜻하는 보통명사가 된 이유다.
이제는 섬유 유연제를 넘어 종합 생활용품 업체로 성장한 피죤의 출발은 창업자 이윤재 회장(75)이 지인이 운영하던 화학업체인 동남합성에 입사한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동남합성의 주력 제품은 공업용 유연제였다. 이 제품은 빳빳한 직물을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덕분에 제일모직 등 대형 섬유업체들의 주문이 끊이지 않았다.
동남합성에 들어가기 전 10년 가까이 무역회사에서 일하며 '사업하는 방법'을 터득했던 이 회장이 이런 아이템의 잠재력을 놓칠 리 없었다. 공업용 유연제의 원리를 응용해 가정용 섬유 유연제를 내놓으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알아보니 이미 선진국에선 섬유 유연제가 빨래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은 터였다. 이 회장은 "우리도 소득이 높아지면 반드시 수요가 있을 것"이라며 회사 연구원에게 제품 개발을 지시한다. 이때가 1973년이었다.
5년여에 걸친 연구개발 끝에 자체 기술로 가정용 섬유 유연제를 개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시장에 내놓느냐는 별개의 문제였다. 먹고살기 바빴던 그 시절에 '듣도 보도 못한' 섬유 유연제를 과연 소비자들이 사 줄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변의 만류가 이어졌다. "하던 일이나 잘하라","집안 망칠 일 있느냐"고.
하지만 이 회장은 밀어붙였다. 동남합성을 박차고 나와 전 재산을 털어 1978년 피죤을 설립한 것.이 회장은 "내 인생의 모든 것을 건 도전이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시판 초기에 고객 반응은 냉담했다. 생전 처음 들어본 회사가 정체불명의 제품을 판매하니 그럴만도 했다. 영업직원이 슈퍼마켓을 찾아가 "피죤이 정전기를 방지해 준다"고 설명하면 한국전력에서 나온 사람으로 착각한 주인이 두꺼비집을 열어줄 정도였다.
이 회장은 마케팅으로 승부를 걸었다. 피죤의 진가를 알리기 위해서는 체험 마케팅밖에 없다는 판단에 주부들이 모이는 곳마다 찾아가 샘플을 건넸다. 그렇게 1985년까지 1t 트럭 1200대 분량의 샘플을 뿌렸다. 여기에 '빨래엔 피죤~'이란 로고송까지 더해지자 매출은 급격하게 늘기 시작했다. 1985년 269만개가 팔린 피죤은 다음해 1000만개가 팔려나갔다.
대기업들이 이런 '블루오션'을 가만둘 리 없었다. 12개 업체가 섬유 유연제 시장에 뛰어들었고 가격도 피죤보다 최대 50%나 싸게 내놓았다. 이 회장은 가격 경쟁 대신 품질과 브랜드파워를 끌어올리는 프리미엄 정책으로 반격했다. 결과는 대성공.피죤의 유혹에 한번 걸려든 소비자들은 다른 제품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이 회장은 더 좋은 제품과 더 좋은 품질로 소비자에게 보답한다는 신념아래 호 · 불황에 관계없이 매출의 10%를 연구개발에 투입했다. 피죤이 글로벌 기업과 대기업의 틈바구니에서 국내 최초로 보디클렌저(마프러스 · 1990년)와 신개념 살균세정제(무균무때 · 1999년),액체 세제(액츠 · 2005년)를 선보일 수 있었던 저력도 여기에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피죤의 성장곡선은 외환위기 때도 크게 흔들리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회장이 들려주는 외환위기 때의 일화 한토막."몇몇 유통업체들이 갑자기 주문량을 10배 이상 늘리더군요. 알고 보니 피죤을 헐값에 팔아 긴급 운영 자금으로 쓰려는 겁니다. 그때 상인들이 그러더군요. '지구 상의 수십만개 물건 중 언제든지 현금 받고 팔 수 있는 물건이 10여개 있는데 금 쌀 코카콜라와 함께 피죤도 들어간다'고.뿌듯했지만 덤핑 판매하는 업체에 물량은 주지 않았습니다. "
미국에서 '엘리트 미술인'코스를 밟아나가던 맏딸 이주연 부회장(45)이 아버지의 부름을 받은 것은 1996년이었다. 디자인이 제품 경쟁력의 핵심 요소로 떠오른 만큼 미술학 박사 학위가 있는 딸의 날카로운 눈썰미와 세심한 손길이 필요했던 것이다.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는 아들(이정준 미국 메릴랜드주립대 경제학과 교수)과 달리 딸은 오래전부터 기업 경영에 매력을 느꼈던 터였다. 디자인팀장으로 피죤에 합류한 이 부회장은 이후 경영 능력도 인정받아 지난해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아버지와 딸은 이제 한반도를 넘어 '글로벌 피죤'으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첫 번째 목표는 중국.연간 50만t 규모의 생활용품을 생산할 수 있는 톈진공장이 다음 달 완공되면 꿈에 한걸음 더 다가서게 된다. 이 회장은 "중국 시장에서 성과를 거두면 동남아시아와 중동 러시아 등지로 피죤의 무대를 넓혀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