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마치 나이 어린 소녀 같아서 당신이 그 소녀에게 어떤 모양으로 분장을 시키면 그 소녀는 곧 그런 모양이 된다는 것이오.승자는 왕이지만 패자는 도둑이 되는 거요. 역사는 승리자가 쓴 책이니까. '

중국 소설가 리얼(42)의 장편소설 《감언이설》(박명애 옮김,문학과지성사)의 주인공 꺼런은 중국 근 · 현대사를 살았던 학자이자 사상가로 얼리깡 전투에 참전해 순국한 '민족의 영웅'이다.

그러나 사실 꺼런은 살아 있었다. 그는 그저 개인(個人,중국어 발음은 '꺼런'으로 주인공의 이름과 발음이 같다)으로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어쨌든 꺼런의 생존 사실이 알려지자 당시 중국 정치세력들에 비상이 걸린다. 이들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화해를 주장하는 골치 아픈 지식인 꺼런을 처리하기 위해 바이성타오,자오칭야오,판지화이 등 3명을 급파한다. 결국 꺼런은 국민당 혹은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일본인에게 암살당하고,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민족의 영웅으로 고스란히 남게 된다.

《감언이설》의 국내 출간을 맞아 방한한 리얼은 17일 기자들과 만나 "국가와 역사라는 거대한 존재에 끼어 있는 개인 꺼런의 운명을 통해 과연 역사에서 진실이란 무엇인지 탐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권력이나 자본의 영향을 받아 역사가 기록되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그 자체를 진실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기록된 역사만큼 허구인 것도 없으며,오히려 허구가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리얼이 채택한 소설 기법은 독특하다. 꺼런의 죽음과 관련된 3명의 구술을 늘어놓고 그 뒤마다 관련 인사들의 이야기나 신문 기사,정리자의 설명 등으로 이뤄진 보충문이 붙어 있다.

그래서 언뜻 보면 소설이 아니라 역사적 기록 모음집 같다는 느낌을 준다. 이를 통해 리얼은 역사적 사건 · 인물과 허구를 뒤섞으며 경계를 모호하게 하고,독자가 '역사에서 진실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유도한다.

주인공 꺼런에 대한 진술은 3명이 각각 처한 입장과 구술한 시기에 따라 제각각이다. 이를 통해 리얼은 역사란 한 겹 한 겹 벗겨나가다 보면 텅 빈 속을 발견하게 되는 양파와 같다고 말한다. 그 텅 빈 공간을 채우고 있는 듯한 무언가가 있다면,그건 진실이 아니라 승자의 감언이설에 불과할 뿐일지도 모르겠다.

2006년 중국에서 권위 있는 문학상인 모뚠 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감언이설》을 쓰기 위해 리얼은 13년을 바쳤다고 말했다. 그는 "수집광처럼 엄청나게 자료를 모았다"면서 "정리자 혹은 수집가의 입장에서 왜 같은 인물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해석이 모두 다른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