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탁 본부장은 '국내 1호 신장 기증자'다. 1991년 1월22일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를 창립한 지 3일 만에 신장 한 쪽을 떼어냈다. 장기 매매가 극성을 부리던 시절에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의 인생을 지탱하는 것은 '헌혈'과 '장기 기증' 두 축이다. 신학대를 나와 우석대병원(현 고려대병원)에서 원목을 하던 그는 1966년 퇴근길에 교통사고를 목격했다. 피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혈액형이 같았던 박 본부장은 첫 헌혈을 했다. 수혈받은 환자는 죽음의 문턱에서 소생했고 그의 삶도 바뀌었다.

아예 직장을 그만두고 한국헌혈협회를 창립(1968년)해 본격적인 헌혈운동에 나섰다. 뜻깊은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살림은 나날이 궁핍해져 갔다. 견디다 못해 1984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이민은 그의 삶을 또 한번 바꿔 놓았다. 뇌사 상태에 빠진 친한 교포가 장기 기증을 하는 모습을 직접 보게 된 것이 계기였다. 그 사람의 간은 피츠버그로,신장은 샌프란시스코로 옮겨져 생면부지 사람들의 생명을 살렸다. 커다란 충격이었다. "고국으로 돌아가 범국민적인 장기 기증 운동을 확산시키는 데 생을 바쳐야겠다"고 다짐한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1991년 장기기증운동본부를 만들었다.

봉사활동에 일생을 바쳤으나 힘겹고 고달파 남몰래 눈물지은 날도 많았다. 장기 기증에 대한 인식조차 없던 시절,'사람들을 모아 장기 장사를 한다'는 투서 때문이었다. 당시 장기를 기증하고 장기를 받은 사람 160명이 모두 검찰에 출두해 조사받는 해프닝까지 있었다. 회원들의 후원금에 의존해야만 하는 열악한 현실도 장애물 중 하나였다.

그의 나이도 올해 일흔 세살이 됐다. 그렇지만 그는 아직도 기운이 넘친다. 박 본부장은 "일주일에 두세 번꼴로 장기기증 캠페인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강연을 다닌다"며 "기력이 다하는 날까지 이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정은 기자 likesmi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