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우의 와인이 있는 서재] (3)처칠의 샴페인 사랑 ‥ "영국군이여, 샴페인을 위해 프랑스를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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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역사상 영국이 배출한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인 윈스턴 레너드 스펜서 처칠 경은 2차 세계대전 초기인 1940년 5월13일 나라 안팎의 큰 기대를 받으며 영국 총리에 취임했다. 당시는 영국이 독일을 상대로 힘겨운 전쟁을 치르던 시기여서,영국 국민들은 처칠에게서 전황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를 간곡히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처칠은 당일 의사당에서 한 취임 연설에서 국민들에게 근거 없는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기보다는 더 많은 피와 땀,눈물과 고역을 요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부리부리한 눈에 굵은 시가를 입에 문 채,두 손가락으로 승리의 상징인 'V'자를 만들어 보이던 그에게선 강인함과 함께 카리스마가 넘쳤다.
그러나 한편으론 끝없이 올라오는 미세한 버블과 섬세한 향을 가진 샴페인을 무척 즐겼던 감수성 또한 풍부한 인물이었다. 실제로 처칠의 일생을 살펴보면 성공한 군인,정치가로서만 아니라 역사가,화가,특히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로도 명성을 널리 알렸던 매우 비범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처칠이 프랑스를 탈환하기 위해 전투 중인 영국 군인들에게 "제군들,우리가 싸우는 목적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샴페인 때문이라는 것도 상기하라"고 격려했을 만큼 처칠을 포함한 영국인들의 샴페인 사랑은 유별났다.
특히 어려운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그는 "아무리 위기와 재난이 계속된다고 해도,나에게는 언제나 샴페인 한 잔 마실 잠깐의 여유는 있다"며 낙관적인 자세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다. 처칠이 주로 마시던 샴페인 브랜드는 '폴 로저'(Pol Roger · 사진),그 중에서도 특히 1928년산을 좋아했다. 실제로 사후에 발견된 영수증철을 참고한 결과 그가 34세이던 1908년 이전부터 이 샴페인을 마신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처칠이 폴 로저 샴페인하우스와 직접 교류를 시작한 것은 1945년 프랑스 주재 영국대사관이 주최한 점심식사에서 이 하우스의 대모이자 빼어난 미모의 재기발랄한 오뎃 폴 로저를 만난 이후다. 첫 만남을 계기로 두 사람은 친밀한 유대관계를 가지게 되는데,처칠은 심지어 본인의 경주용 말들의 이름을 폴 로저로 지을 정도였다. 흥미롭게도,이 말들 가운데 한 마리가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한 1953년 켐톤 파크에서 열린 경마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렇게 각별한 처칠의 브랜드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폴 로저는 처칠만을 위해 특별한 샴페인 용기를 만들었고 사후에는 그의 이름이 오래 기억될 수 있는 샴페인을 탄생시켰다. 상업적으로 가장 많이 팔리는 정규(Standard) 샴페인 한 병의 용량은 750㎖이며,이보다 작은 반 병(Demi,Half Bottle)짜리는 375㎖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아침 늦게 일어나는 습관이 있는 처칠의 방으로 매일 오전 11시에 배달되는 샴페인은,폴 로저가 그를 위해 특별히 만든 600㎖ 용량의 임페리얼 파인트(Imperial Pint) 병에 담겨졌다.
처칠이 사망한 1965년에는 영국으로 수출하는 그해 생산된 모든 폴 로저 샴페인의 은색 상표(White Foil) 라벨을 검은 색으로 처리해 애도의 의미를 전하기도 했다. 또한 서거 10주년인 1975년부터 처칠의 이름을 딴 특급 샴페인을 생산하기 시작해 1983년 처칠의 생가인 영국의 블렌하임궁에서 출시했다.
근세기 최고 품질 샴페인 중 하나로 인정받는 '폴 로저 쿠베 서 윈스톤 처칠'(Pol Roger Cuvee Sir Winston Churchill)은 처칠의 높은 미각 취향을 기리기 위해 생전에 그가 즐겼던 그대로의 맛과 향을 충분히 반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골격이 단단하고 숙성도가 높으면서도 활력이 넘친다. 특히 풍부한 꽃과 과일 향에 부드럽게 순화된 매운 향이 더해진 아로마가 특징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포도품종 간 블렌딩한 정확한 배합 비율은 처칠가(家)와 폴 로저 하우스 사이에 맺은 묵계에 의해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처칠가의 폴 로저 샴페인에 대한 사랑은 대를 이어 계속됐다. 처칠의 사위이자 영국의 마지막 로디지아(지금의 짐바브웨) 총독이었던 소암스 경 또한 폴 로저 샴페인의 열성적인 애호가였다.
그는 로디지아를 흑인 독립국으로 전환시키는 평화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지루하게 기다리는 기자들에게 협상은 길어도 30일을 넘기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 근거를 묻는 기자들에게,그는 "내가 이곳에 준비한 폴 로저 샴페인이 이제 30병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와인 칼럼니스트 · 여유공간 대표
그러나 처칠은 당일 의사당에서 한 취임 연설에서 국민들에게 근거 없는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기보다는 더 많은 피와 땀,눈물과 고역을 요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부리부리한 눈에 굵은 시가를 입에 문 채,두 손가락으로 승리의 상징인 'V'자를 만들어 보이던 그에게선 강인함과 함께 카리스마가 넘쳤다.
처칠이 프랑스를 탈환하기 위해 전투 중인 영국 군인들에게 "제군들,우리가 싸우는 목적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샴페인 때문이라는 것도 상기하라"고 격려했을 만큼 처칠을 포함한 영국인들의 샴페인 사랑은 유별났다.
특히 어려운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그는 "아무리 위기와 재난이 계속된다고 해도,나에게는 언제나 샴페인 한 잔 마실 잠깐의 여유는 있다"며 낙관적인 자세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다. 처칠이 주로 마시던 샴페인 브랜드는 '폴 로저'(Pol Roger · 사진),그 중에서도 특히 1928년산을 좋아했다. 실제로 사후에 발견된 영수증철을 참고한 결과 그가 34세이던 1908년 이전부터 이 샴페인을 마신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각별한 처칠의 브랜드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폴 로저는 처칠만을 위해 특별한 샴페인 용기를 만들었고 사후에는 그의 이름이 오래 기억될 수 있는 샴페인을 탄생시켰다. 상업적으로 가장 많이 팔리는 정규(Standard) 샴페인 한 병의 용량은 750㎖이며,이보다 작은 반 병(Demi,Half Bottle)짜리는 375㎖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아침 늦게 일어나는 습관이 있는 처칠의 방으로 매일 오전 11시에 배달되는 샴페인은,폴 로저가 그를 위해 특별히 만든 600㎖ 용량의 임페리얼 파인트(Imperial Pint) 병에 담겨졌다.
처칠이 사망한 1965년에는 영국으로 수출하는 그해 생산된 모든 폴 로저 샴페인의 은색 상표(White Foil) 라벨을 검은 색으로 처리해 애도의 의미를 전하기도 했다. 또한 서거 10주년인 1975년부터 처칠의 이름을 딴 특급 샴페인을 생산하기 시작해 1983년 처칠의 생가인 영국의 블렌하임궁에서 출시했다.
처칠가의 폴 로저 샴페인에 대한 사랑은 대를 이어 계속됐다. 처칠의 사위이자 영국의 마지막 로디지아(지금의 짐바브웨) 총독이었던 소암스 경 또한 폴 로저 샴페인의 열성적인 애호가였다.
그는 로디지아를 흑인 독립국으로 전환시키는 평화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지루하게 기다리는 기자들에게 협상은 길어도 30일을 넘기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 근거를 묻는 기자들에게,그는 "내가 이곳에 준비한 폴 로저 샴페인이 이제 30병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와인 칼럼니스트 · 여유공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