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대 국회는'한국식 민주주의'를 시험하는 중이다. '다수결 없는 국회'가 그 요체(要諦)로서,이것이 성공하면 정당의 국회의석 수는 의미가 없어지고 국회는 다른 사회기구가 재결(裁決)한 안건을 법으로 통과시키는 요식절차만 하게 된다. 즉,인구 4860만명의 국가에서 '국민의 대의자(代議者) 선출이 필요 없는 민주주의'를 지금 실험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일년간 국회는 민주당의 독립전쟁터나 다름없었다. 거대여당이 제안한 쟁점법안은 하나도 논의될 수 없었고 현재 2548개의 법안이 처리를 기다리고 있다. 민주당이 드디어 양보한 미디어법의 처리방법은 '사회적 합의기구'를 만들어 국회의원이 할 일을 외부에 맡겨 보자는 것이다. 위원은 171석의 한나라당이나 95석의 세 야당이나 똑같이 10명씩 추천하고 2명의 공동위원장을 두고 100일간 논의하고 그 뒤 어찌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쯤 되면 대의정치를 도태시키자는 야당의 목적은 거의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다수결은 실상 우리가 매일 민주사회의 규칙으로 배우고 체험하는 것이다. 초등생이 소풍갈 곳을 정할 때나 성인이 대통령을 뽑을 때나 다수결로 선택한다. 그 결과가 불만족해도 내가 양보하고 승복함이 상식이다. 극렬한 노조도 파업할지를 다수결로 정하고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은 다수결 판정으로 국법의 기본을 만든다. 이 상식적 민주주의 원칙을 야당정치인들은 왜 타도하려 하는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최근 "다수결이 아니라 대화와 타협이 민주주의 핵심원리"라는 주장을 그의 홈페이지에 올렸다. 우리 민주주의는 관용과 상대주의가 부족한 사람들 때문에 안 된다는 내용인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다수결정은 이를 도저히 납득하거나 양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강행하면 그 효과도 못 보고 공동체통합에 손상을 입힌다. 따라서 다수결 이전에 설득과 타협의 과정이 필요하며,이를 통해 남의 다름을 존중하고 수용해서 공동체의 가치로 통합할 줄 아는 사고와 행동이 필요하다. 이것이 '적극적 관용'이며 나는 이를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 사회는 비관용주의자들 때문에 이를 들먹이는 것 자체가 사치스럽다. 우리는 국가보안법이 관용을 훼손하기 때문에 반대하고,강정구 교수의 발언 정도는 민주사회에서 용납되어야 할 자유이기 때문에 그의 처벌을 부정한다. 그런데 김수환 추기경 같은 분마저도 이를 납득 못하니 우리 민주주의의 앞날이 얼마나 험난하겠는가? 그러나 나는 포기할 수 없어 앞으로도 이런 이야기를 계속하려 한다. "

노 전 대통령은 '관용의 민주주의'가 끝내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 어떤 규칙이 필요한지를 언급하지 않는다. 소수의 특정집단이 끝까지 합의를 거부할 때 국가운영을 한없이 멈춰야 하는가? 이럴 때 다수의 의사를 따르고 소수가 이에 승복함이 민주주의의 본의(本義)며 세계 모든 성숙한 민주국가의 관행 아닌가?

지금 이 사회의 관용을 거부하는 독선자가 누구인가? 과거 독재시대 때 민주인본주의를 지키고 오늘날에는 인권말살의 북 체제를 동경하고 전파하는 행위를 경계한 김수환 추기경이 독선자인가,아니면 국민의 선거권을 부정하고 소수 이념주의자가 활갯짓할 직접민주주의를 선동하는 자들이 독선자인가?

한국의 좌파들은 그들이 절대로 타협하거나 승복하지 않는 집단임을 지난 광우병 촛불시위나 국회만행 행태에서 여실히 보여주었다. 다수결규칙이 없다면 규칙에 승복하는 집단은 나라가 결딴이 나건 말건 끝까지 불복하고 행패하는 집단을 당할 수가 없다. 다수결을 부정하고 무조건 타협만 부르짖는 사람들의 목적은 뚜렷하다. 국민다수의 권리를 보장하는 민주주의 장치를 파괴하여 '그들만의 민주주의'를 해보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