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남편은/ 두만강을 탈없이 건넜을까?// 저리 국경 강안을 경비하는/ 외투 쓴 검은 순사가/ 왔다-갔다-/ 오르명 내리명 분주히 하는데/ 발각도 안되고 무사히 건넜을까?// 소금실이 밀수출 마차를 띄워 놓고/ 밤새 가며 속태우는 젊은 아낙네,/ 물레 젓던 손도 맥이 풀려서/ '파!'하고 붙는 어유 등잔만 바라본다. / 북국의 겨울 밤은 차차 깊어 가는데.'(김동환 시 <국경의 밤> 첫부분)

'마을을 휩쓰는 회오리 바람소리 날카롭다. 극장 전체가 눈보라치는 추운 밤 속에 들어앉은 듯한 조명이다. … (중략) 여인 4:(다듬이질한다)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무대 한구석에 등잔불 앞에 앉은 순이의 모습이 나타난다) 순이: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김지원 시극 <국경의 밤> 첫부분)

김동환 시인(1901~?)이 1925년 발표한 우리나라 최초의 장편 서사시 <국경의 밤>이 시인의 딸인 소설가 김지원씨(67)의 손을 거쳐 동명의 시극 극본으로 탄생했다. 김씨의 시극은 월간 <문학사상> 3월호에 게재된다. 김지원씨는 자신이 8세 때 납북돼 생사를 알 수 없는 아버지 김동환 시인의 대표작 <국경의 밤>을 시극으로 각색하는 일을 오래 전부터 염두에 뒀다가 최근 마무리했다.

김씨의 시극은 원작의 서사적 전개를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모두 4막으로 구성됐다. 1막과 2막에서는 소금 밀수꾼 남편의 안전을 걱정하는 주인공 순이 앞에 옛시절 사랑했으나 이별해야 했던 청년이 등장하고 이들의 옛 이야기가 펼쳐진다.

3막과 4막에서는 구애하는 청년 앞에서 갈등하다 끝내 거절하는 순이에게 남편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날아들면서 순이에게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이 펼쳐질 것이 암시된다. 원작인 시는 3부72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나,김씨의 시극에서는 3부에 해당하는 부분이 3막과 4막으로 나뉘어 극적 장면 연출을 꾀했다. 또 김동환 작사 <봄이 오면> 등을 음악으로 사용하라고 지시하는 등 무대 효과를 구체적으로 설정했다.

김씨와 20년 넘는 친분으로 시극의 문예지 게재를 주선한 소설가 서영은씨는 "아버지가 안 계신 상황에서 성장하면서 아버지가 남긴 작품을 읽으며 추억을 되살리고 작가로 성장하는 자양분으로 삼지 않았을까 싶다"면서 "지원이의 경우에는 국경 너머로 부친이 납북됐다는 점,약 30년 동안 미국에 체류하면서 고국과 멀어져 있다는 상황과 맞물리며 국경 주변에서 벌어진 일을 소재로 한 <국경의 밤>이 더욱 특별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서씨는 또 "최근 몇년간 몸이 아팠던 지원이가 시극 각색 작업을 하면서 심신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며 "이 시극을 써서 아버지에게 자식의 도리를 다한 듯한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원이뿐 아니라 지원이의 동생(소설가 김채원씨) 또한 이 작업에 관심이 있었다고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동환 시인과 소설가 최정희씨 사이에서 태어난 지원 · 채원씨는 문학적 재능을 이어받아 1997년 <사랑의 예감>,1989년 <겨울의 환>으로 각각 이상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자매다.

권영민 문학사상 주간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납북된 후 그 종적을 알 수 없는 아버지 김동환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이 작품을 만들어내게 된 동기"라고 해설했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

[용어풀이]

◆시극(詩劇)

대사가 시의 형식으로 꾸며진 일종의 희곡.극본의 대사가 운문 중심이나 부분적으로는 산문이 사용되기도 한다. 시극은 산문극에 비해 호소력과 서정성이 훨씬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