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씹다 버린 껌./이빨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껌./이미 찍힌 이빨자국 위에/다시 찍히고 찍히고 무수히 찍힌 이빨자국들을/하나도 버리거나 지우지 않고/작은 몸속에 겹겹이 구겨넣어/작고 동그란 덩어리로 뭉쳐놓은 껌./…(중략) 이빨들이 잊고 있던 먼 살육의 기억을 깨워/그 피와 살과 비린내와 함께 놀던 껌./지구의 일생 동안 이빨에 각인된 살의와 적의를/제 한몸에 고스란히 받고 있던 껌./마음껏 뭉개고 갈고 짓누르다/이빨이 먼저 지쳐/마지못해 놓아준 껌.'(<껌>)

시인 김기택씨(51)의 새 시집 《껌》(창비)에 실린 시들은 연약하고 무기력한 것들을 응시하며 우리의 몸과 일상 속에 있는 본능을 짚어낸다. 그는 표제작 <껌>에 대해 "인간이 생각하는 갈대라지만 우리의 깊은 곳에는 살육의 쾌감 같은 동물성이 잠재돼 있다"면서 "잡아먹으려는 욕망과 살아남겠다는 본성이 이빨과 껌의 관계에 압축돼 있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소 등 동물을 다룬 시들을 발표해온 김씨는 "인간이 감추거나 가린 성질이 동물에게서 잘 드러난다"며 "동물이 지니고 있는 두려움이나 동물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결국 인간의 두려움이나 폭력을 더 잘 비춰준다"고 말했다. 그래서 자동차에 치여 죽은 어린 고양이(<고양이 죽이기>)와 소의 예민하고 부드러운 코를 장악한 코뚜레(<코뚜레>)의 비애를 남다르게 묘사한다.

노인이나 어린이 등 약자들을 다룬 시도 눈에 띈다. <계단 오르는 노인>에서는 '머리카락 한 올,실핏줄 한 가닥,주름 한 줄,땀 한 방울,때 하나의 무게까지/남김없이 관절 하나에 실으며 오르는 또 한 계단.'이라고 힘겹게 걸음을 떼는 노년을 묘사했다. <건강이 최고야>에서는 혜진 · 예슬 어린이를 유괴 · 살해한 자의 간악함을 보여준다.

그는 "불구자나 노인이나 어린이 등 약한 존재에게서는 강하고 건강한 사람들에게서는 쉽게 보이지 않는 인간의 특징이나 본성이 더 잘 드러나서 시적 호기심이 발동된다"고 말했다. 김씨는 "우리가 아무리 문명화되고 정신적인 존재라고 해도,일례로 먹기 위해 다른 생명을 죽이면서도 남을 죽인다는 의식이 없는 마비상태가 있다"면서 "누구나 생각하기 싫어하는 부분을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싶었다"고 전했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