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을 좋아하고 조선후기의 문예 부흥을 이끈 것으로 알려진 조선 22대 왕 정조(正祖).

그래서 흔히 영화나 소설,드라마에선 지조 있는 선비형의 점잖은 군주로 그려지지만 사실은 막후정치에 능하고 여론에 민감했으며 다혈질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9일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과 한국고전번역원이 공개한 6책 299통의 정조 어찰첩(御札帖)을 통해서다.

◆정조의 비밀편지,뭘 담았나=이번에 공개된 정조 어찰첩은 정조가 1796년 8월20일부터 1800년 6월15일까지 예조판서와 우의정 등을 역임한 노론 벽파의 거두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편지들을 담고 있다.

대부분 정조의 친필이며 그동안 심씨 집안에서 전해오던 것을 개인 소장가가 갖고 있다가 학자들의 연구를 위해 공개했다.

이는 조선시대 어찰로는 분량이 가장 많을 뿐만 아니라 비밀편지가 이처럼 무더기로 남아 있는 것은 유례없는 일.정조가 없애라고 누누이 당부했는데도 심환지가 이를 거부하고 고스란히 모아뒀을 뿐만 아니라 어찰을 받은 날짜와 시간,장소까지 기록해둬 역사적 의미가 더욱 크다.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이들 편지에는 국왕이 대신과 국정 현안에 대해 갈등 · 조정하고 여론 동향을 캐는 등 다양하고 은밀한 통치행위의 비밀이 담겨 있어 획기적인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했다.

《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권력자들 간의 암투와 흑막 등을 확인할 수 있어 연구 결과에 따라서는 조선시대 정치사를 새로 써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조 독살설은 낭설?=정조는 심환지에게 여러 차례 자신의 심각한 병세를 토로했다. 특히 사망하기 13일 전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에서는 "뱃속의 화기(火氣)가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가지 않는다"며 병세가 심해져 약을 달고 살며,항상 얼음물을 마시거나 차가운 구들장 장판에 등을 붙인 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일이 고생스럽다고 하소연했다.

이로 볼 때 심환지나 노론 벽파가 정조를 독살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안 교수는 설명했다.

그동안 일부 소설과 영화,드라마 등에서는 노론 벽파의 심환지가 정조를 독살한 것으로 그린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 어찰첩은 독살설의 근거가 희박함을 보여준다.

◆노론 벽파와 정조의 관계는=그동안 대립관계로만 봐온 정조와 노론 벽파의 관계도 새롭게 연구해야 할 상황이다.

편지들을 보면 정조는 각종 현안이 있을 때마다 밀서를 보내 심환지와 미리 상의했고,때로는 서로 각본을 짜고 일을 처리하거나 은밀하게 지시한 경우도 많다. 정치적 입장이 달랐던 벽파이지만 그 실체를 인정하고 국정 운영의 파트너로 삼았다는 얘기다.

정조는 "요사이 벽파가 탈락한다는 소문이 자못 성행한다는데 내외허실(內外虛實)에 비하면 그 이해와 득실이 과연 어떠한가?"라며 당파로서 벽파 세력의 약화를 우려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또 많을 때는 하루에만 네 통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고 어떤 날은 아침에만 세 번이나 밀서를 보낼 만큼 긴밀하게 조율하며 정국을 운영했다. 과거시험에서 심환지의 큰아들을 300등 안에만 들면 합격시키려 했으나 그렇지 못해 안타깝다고 위로하는 편지도 있다.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정조가 노론 벽파는 물론 노론 시파와 남인,소론 등 각 당파들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전체 그림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큰 조각 하나를 발견한 셈"이라며 "이들 편지가 조선 후기 정치사 연구의 새로운 과제를 던졌다"고 말했다.


◆다혈질의 노회한 정치가=정조는 점잖은 선비형의 군주라는 통념과 달리 노회한 정치가였다. 주변 인물들을 평가할 때 막말도 마다하지 않았고,분을 쉽사리 참지 못하는 다혈질이었지만 다양한 정파들이 난립한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여론에 대단히 민감했다.

첩보를 입수하기 위해 노력했고 심환지와 서로 짠 각본에 따라 상소를 올리도록 하거나 인사를 하는 등 노회한 통치술을 구사했음을 이들 편지는 보여준다.

정조는 최측근이던 서영보를 '호로자식(胡種子)'이라고 평했고,촉망되는 젊은 학자 김매순에 대해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미처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한 놈이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렸다"고 혹평했다.

"나는 요사이 놈들이 한 짓에 화가 나서 밤에 이 편지를 쓰느라 거의 5경이 지났다"며 1799년 11월24일 아침에 보낸 편지는 그의 다혈질적 성격을 보여준다.

기호학파의 한 갈래였던 호론(湖論)의 대표인 한원진을 비판한 김매순 등의 행태에 흥분해 며칠 동안 밤잠을 설친 뒤 새벽같이 보낸 편지다. 정조의 다혈질은 화기가 솟아 열과 종기로 고생하다 사망한 것과도 무관치 않다.

한문 편지 중간에 한글이나 이두가 등장하거나 구어체 문장,속담,속어도 자주 등장한다. 1797년 4월11일에 보낸 편지에서는 "지금처럼 벽파의 무리가 '뒤죽박죽'이 되었을 때에는…"이라며 한글을 느닷없이 썼고,'모쪼록'을 '某條(모조)'로 직역해 이두(吏讀)식으로 쓰기도 했다. 간결하고 짧지만 생각의 핵심을 분명하게 전하기 위해 문어체보다는 대화체,구어체를 즐겨 썼을 것으로 안 교수는 분석했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