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개봉된 영화 '접속'은 사이버 공간에서 채팅으로 인연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그렸다.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유치하기 이를데 없는 풍경이지만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당시 인기를 끌었던 하이텔 나우누리 등 PC통신은 얼굴도 모르는 이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었고,미국 영국 등 외국의 새로운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창구이기도 했다.

당시 인터넷 속도는 어땠을까. 전화선을 PC 모뎀에 연결해 접속할 때 '치익~삐이익~삐~'하는 연결음이 한참이나 나오고서야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었던 1997년,인터넷 최고 속도는 초당 128킬로 비트(Kbps)였다. 5메가바이트(MB) 크기의 MP3파일을 다운로드 받는데 무려 5분이 걸렸다. 요즘 일반화되고 있는 광랜 속도인 초당 100메가 비트(Mbps)는 불과 0.4초 소요됨을 감안하면 거북이도 예사 거북이가 아니었던 셈이다.

인터넷 속도의 변화는 단순히 사용자의 편의를 높여준데 그치지 않고 인터넷 환경과 비즈니스를 획기적으로 바꾸는데 일조해왔다. 정부가 2012년께 1기가급(Gbps) 울트라 초고속 인터넷 고속도로를 건설하기로 한 방송통신망 고도화 계획이 주목받는 이유다.

◆10년새 인터넷 속도 1만배 빨라져

국내에 인터넷이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994년 6월 KT(당시 한국통신)가 코넷(KORNET)을 구축하면서였다. 1980년대 초 대학과 연구기관에 인터넷망이 도입됐으나 일반인들은 접근할 수 없었고 극소수의 대학생이나 연구원이 사용하는데 그쳤다. 당시 코넷 속도는 9.6Kbps.5M 크기 MP3 파일을 다운로드 받으려면 무려 1시간 9분이 걸렸다. 당시 요금제가 종량제였던 점을 감안하면 MP3파일 1개를 다운받으려면 시간도 시간이지만 적잖은 통신요금까지 부담해야 했다. 그래서 당시 멋모르고 인터넷을 썼다가 월 전화비가 10만원을 훌쩍 넘기 일쑤였다.

인터넷이 폭발적으로 팽창하게 된 계기는 1998년 두루넷이 케이블모뎀을 사용해 2~10Mbps의 인터넷서비스를 내놓으면서부터였다. 기존 전화모뎀에 비해 속도가 100배 빨라져 이용자들이 크게 늘어났다. 서울 혜화동,홍대 근처,신촌,종로 등 대학가 중심으로 PC방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서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1998년 전국에 3000여개에 불과했던 PC방은 2000년초에 2만2000여개로 증가했다. 인터넷 속도가 빨라진 덕분에 '리니지'같은 온라인게임이 등장해 인기를 끌었다. 인터넷 속도의 진화가 한국이 온라인게임의 종주국이 되게 한 밑거름이 된 셈이다.

2006년에는 100Mbps의 광랜이 등장했다. 1994년 9.6kbps였던 인터넷 속도가 꼭 12년만에 1만배 빨라진 것이다. 광랜이 빠르게 보급되면서 인터넷 흐름은 텍스트,사진 위주에서 동영상으로 빠르게 넘어갔다. 2007년 대통령 선거 때 동영상 위주의 손수제작콘텐츠(UCC)가 여론을 주도한 배경이 되기도 했다. 용량이 큰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무리없이 주고받을 수 있게 된 덕분이었다.

◆울트라 초고속,인터넷 지도 다시 쓸까

방통위는 유선 인터넷 속도가 기가급으로 빨라지고 무선 인터넷 속도가 지금보다 10배 빠른 평균 10Mbps가 되는 2012년께는 집 안에서 보던 인터넷TV(IPTV)를 바깥에서 걸어다니면서 볼 수 있고,3차원 영상이나 초고화질 영상으로 쌍방향 소통이 가능해질 것으로 예상한다. 예컨대 동영상 콘텐츠를 빠른 속도로 업로드 및 다운로드 하는게 가능해 언제 어디서나 휴대폰 하나로 현장감 있는 동영상을 찍어 IPTV 등을 통해 알리는 개인 방송도 활성화될 것으로 보인다. 자동차나 도보로 길을 찾을 때 내비게이션이나 휴대폰으로 실물과 똑같은 환경에서 길안내를 받을 수도 있게 될 전망이다. 심지어 공상과학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것처럼 홀로그램 기술을 활용해 휴대폰이나 PC 모니터 상에 가상 피사체가 나오고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대도 그닥 멀지 않았다는 얘기도 나온다.

유 · 무선 통신이 인터넷 프로토콜(IP) 기반으로 바뀌면 다양한 통신 비즈니스가 생겨나고,그만큼 널찍한 인터넷 고속도로가 필요하다. 인터넷 도로가 넓어지면 오가는 차가 많아지는 것은 물론 차량 크기도 더 커질 것이라는 게 방통위의 판단이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인터넷 속도가 빨라지면 현장감이나 사실감이 뛰어난 게임 개발이 가능해지고,다양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게임에 추가해 새로운 장르의 게임을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인터넷 속도가 PC방의 부흥을 가져왔고 이것이 온라인게임의 성장을 촉진시켰던 것처럼 게임산업에 순기능을 할 것이라가는 지적이다.

이제는 인터넷 속도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반론도 나온다. 속도가 100Mbps를 넘어가도 사용자가 이를 체감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속도가 더이상 중요한 변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기존의 100Mbps 속도에서도 IPTV 등으로 쌍방향 서비스에 무리가 없어 기가 인터넷 시대가 열리더라도 당장은 바뀔 게 없다 주장도 나온다. IT업계 관계자는 "인터넷 속도가 빨라지면 인터넷 서비스도 진화하겠지만 과거 Kbps 수준에서 Mbps로 속도가 바뀌었을 때처럼 파괴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영태 기자 pyt@hankyung.com

MP3 파일(5MB) 다운로드 속도의 변화

1994년 전화모뎀 9.6Kbps 1시간 9분
1995년 전화모뎀 28.8Kbps 23분
1996년 ISDN 128Kbps 5분
1999년 ADSL 8Mbps 5초
2002년 VDSL 50Mbps 0.8초
2006년 광랜 100Mbps 0.4초
2012년 기가인터넷 1Gbps 0.0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