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악역 자처한 우리시대 엄마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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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진씨의 소설집 《착한 가족》(문학과지성사)에 등장하는 가족들의 모습과 그들의 문제는 우리 주변 여느 가족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은 다른 식구들에 부대끼기도 하고,때로는 가족 때문에 감수해야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보기도 한다.
평범한 주부는 하루 동안 비굴한 여자와 당당한 여자를 오가는 신들린 듯한 연기력을 선보이고,아빠를 끔찍하게 사랑하는 딸은 진실을 알기 위해 며칠 동안 아빠의 뒤를 밟는다. 서씨는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지금 이 시간에도 어떤 가족이 겪고 있을 법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표제작 <착한 가족>의 '여자'에게는 '착하고 순하지만' 폭력사건에 휘말린 아들이 있고 '천성과도 같은 정의감이 있지만' 회사에서 몰려날 위기에 처한 남편이 있다. 평범한 어머니이자 아내인 그는 궁지에 몰린 남편과 아들의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나름대로 계책을 세운다.
아들 일행에게 폭행당한 아이 어머니와 원만하게 합의하기 위해 그날 오전 여자는 보푸라기가 인 낡은 털 점퍼를 걸치고 거울 앞에서 가엾은 표정을 숙련한다.
남편의 회사 이사를 압도하기 위해 그날 오후 여자는 하이힐을 신고 대리석이 깔린 복도를 두어 차례 왕복하며 차분하고도 오만한 걸음을 연습한다. 누군가의 아내,누군가의 어머니도 여자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그렇게 고단한 하루를 보내게 됐을 것이다.
아빠의 외도는 딸을 졸지에 미행자로 만들기도 한다. 또다른 수록작 <아빠의 사생활>에서 아빠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된 딸은 친구와 함께 아빠와 내연녀의 밀월여행을 추적한다. 내연녀에게 비싼 구두를 사주며 '제법 선수의 자세가 나오는' 아빠는 딸이 알던 다정한 모습과는 너무나 다르다. 결국 딸은 '눈이 시리고 마음이 시리고 온 가슴이 시렸다. 저 막힌 데 없고 이정표 없는 들판 같은 날들이 내 앞에 놓여 있었다'라고 생각하면서 어른이 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단편 <슬픔이 자라면 무엇이 될까?>는 '쉰넷에 이르도록 스스로에 대해 평범하지 않은 어떤 점도 발견할 수 없는 여자'가 암 선고를 받고 죽음을 맞는 과정을 다룬 작품이다. 남편은 죄책감에 빠져들고,아들은 흑흑 느껴 울고,시아버지는 마음대로 쓰라고 통장과 도장을 내민다. 죽음을 눈앞에 둔 여자에게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다른 사람 상처 내는 일,싫은 소리,해 되는 짓 절대 안 하잖아.그게 다 네 상처로 돌아간 게 아닌가 싶어."
이외에도 <모두들 어디로 가는 것일까> 등 단편 8편이 실렸다. 문학평론가 정여울씨는 "서하진의 소설에서 단연 눈에 띄는 캐릭터는 천의무봉의 화술과 천변만화한 연기력을 지닌 엄마들"이라며 "이들은 가족의 울타리가 되기 위해 스스로 악역을 자처한 듯한 뉘앙스를 풍기지만,가족들은 그녀의 가면을 고마워하지도 소중해하지도 않는다"고 분석했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
평범한 주부는 하루 동안 비굴한 여자와 당당한 여자를 오가는 신들린 듯한 연기력을 선보이고,아빠를 끔찍하게 사랑하는 딸은 진실을 알기 위해 며칠 동안 아빠의 뒤를 밟는다. 서씨는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지금 이 시간에도 어떤 가족이 겪고 있을 법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표제작 <착한 가족>의 '여자'에게는 '착하고 순하지만' 폭력사건에 휘말린 아들이 있고 '천성과도 같은 정의감이 있지만' 회사에서 몰려날 위기에 처한 남편이 있다. 평범한 어머니이자 아내인 그는 궁지에 몰린 남편과 아들의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나름대로 계책을 세운다.
아들 일행에게 폭행당한 아이 어머니와 원만하게 합의하기 위해 그날 오전 여자는 보푸라기가 인 낡은 털 점퍼를 걸치고 거울 앞에서 가엾은 표정을 숙련한다.
남편의 회사 이사를 압도하기 위해 그날 오후 여자는 하이힐을 신고 대리석이 깔린 복도를 두어 차례 왕복하며 차분하고도 오만한 걸음을 연습한다. 누군가의 아내,누군가의 어머니도 여자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그렇게 고단한 하루를 보내게 됐을 것이다.
아빠의 외도는 딸을 졸지에 미행자로 만들기도 한다. 또다른 수록작 <아빠의 사생활>에서 아빠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된 딸은 친구와 함께 아빠와 내연녀의 밀월여행을 추적한다. 내연녀에게 비싼 구두를 사주며 '제법 선수의 자세가 나오는' 아빠는 딸이 알던 다정한 모습과는 너무나 다르다. 결국 딸은 '눈이 시리고 마음이 시리고 온 가슴이 시렸다. 저 막힌 데 없고 이정표 없는 들판 같은 날들이 내 앞에 놓여 있었다'라고 생각하면서 어른이 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단편 <슬픔이 자라면 무엇이 될까?>는 '쉰넷에 이르도록 스스로에 대해 평범하지 않은 어떤 점도 발견할 수 없는 여자'가 암 선고를 받고 죽음을 맞는 과정을 다룬 작품이다. 남편은 죄책감에 빠져들고,아들은 흑흑 느껴 울고,시아버지는 마음대로 쓰라고 통장과 도장을 내민다. 죽음을 눈앞에 둔 여자에게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다른 사람 상처 내는 일,싫은 소리,해 되는 짓 절대 안 하잖아.그게 다 네 상처로 돌아간 게 아닌가 싶어."
이외에도 <모두들 어디로 가는 것일까> 등 단편 8편이 실렸다. 문학평론가 정여울씨는 "서하진의 소설에서 단연 눈에 띄는 캐릭터는 천의무봉의 화술과 천변만화한 연기력을 지닌 엄마들"이라며 "이들은 가족의 울타리가 되기 위해 스스로 악역을 자처한 듯한 뉘앙스를 풍기지만,가족들은 그녀의 가면을 고마워하지도 소중해하지도 않는다"고 분석했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