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 다국적제약사 '에버그린 전략' 내년 집중 감시

특허 소송을 남발하는 방식 등으로 국내 제약사들의 복제약 출시를 가로막아 온 다국적 제약사들의 '에버그린 전략'에 제동이 걸릴 전망이다. 그동안 의약품 리베이트 조사에 주력했던 공정거래위원회가 내년부터 다국적사의 '특허권 남용 행위'에 대한 법 집행을 강화하겠다고 천명했기 때문이다. 공정위는 또 다국적사들이 자사의 의약품을 국내사와 공동 판매하는 과정에서 불공정 거래를 하는지에 대해서도 집중 감시키로 했다.

22일 제약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18일 청와대에서 열린 '2009년 대통령 업무계획 보고'에 다국적사의 특허권 남용 행위를 집중 감시 대상에 포함시켰다. 8조~9조원에 달하는 국내 처방약 시장의 30%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다국적사들이 원천특허가 만료된 의약품에 대해서도 독점적 지위를 지키기 위해 어떤 불법적인 행위를 하는지 살펴보겠다는 것이다.

업계에서는 다국적사들이 국내사를 대상으로 잇따라 제기하고 있는 특허권 침해 소송이 1차 조사대상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 상당수 다국적사들이 자사가 개발한 오리지널 신약의 원천특허가 만료될 즈음 성분을 조금 변형하거나 제조법을 변경하는 방식으로 후속 특허를 출원한 뒤 국내사가 복제약을 내놓으면 "특허를 침해했다"며 소송을 제기하고 있어서다.

실제 2005년 18건에 불과했던 다국적사와 국내사 간 의약품 특허심판 청구건수는 올 들어 50건 이상으로 불어난 상태다.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3대 의약품인 사노피-아벤티스의 '플라빅스'(항혈전제)와 화이자의 '리피토'(고지혈증치료제),'노바스크'(고혈압치료제)도 모두 특허 분쟁에 휘말려 있다. 이 중 플라빅스와 리피토는 1심과 2심에서 "새로 출원한 특허에 신규성이나 진보성이 없다"는 이유로 동아제약 등 국내사가 승소했고,노바스크도 2심에서 안국약품이 이겼다. 사노피-아벤티스의 항암제 '엘록사틴' 역시 같은 이유로 지난 10월 대법원이 보령제약의 손을 들어줬다.

이처럼 승소 가능성이 높지 않은데도 다국적사들이 '줄소송'을 내는 것은 '손해볼 게 없는 장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 국내사 입장에선 소송을 당했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된다. 중소 제약사의 상당수는 막대한 소송비용과 패소시 물어야 할 손해배상금에 위축돼 복제약 출시를 포기하고 있으며,대형 업체들도 1심 판결이 날 때까지 출시를 보류하는 경우가 많다. 다국적사 입장에선 그만큼 오리지널 신약의 독점 기간이 늘어나는 효과를 누리게 된다.

<< 업계에서는 다국적사가 국내사에 복제약을 내놓지 않는 조건으로 일종의 '합의금'을 건네는지 여부도 공정위의 조사대상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일부 업체들이 유럽에서 이런 행태를 벌이다 적발돼 유럽연합(EU) 경쟁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어서다. >>

한 국내 제약사 관계자는 "다국적사 입장에선 복제약이 나오면 시장을 잠식당할 뿐 아니라 오리지널 신약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가도 20% 깎이는 만큼 복제약 출시를 최대한 늦추는 것이 지상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며 "복제약 출시가 늦어진 데 따른 손해는 비슷한 효능의 약을 저렴하게 구입할 기회를 잃은 환자들에게 돌아간다"고 말했다.

공정위가 국내외 제약사 간 공동 마케팅을 내년 주력 감시대상으로 삼은 것은 '블록버스터'급 의약품을 보유한 일부 다국적 제약사들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판권을 다른 회사에 주겠다"는 식으로 국내사에 불공정 거래를 강요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예컨대 다국적 제약사 A가 유명 의약품의 공동 판매권을 국내 B사에 내주는 조건으로 "앞으로 우리가 만든 모든 의약품에 대해 복제약을 내놓지 말라" "병ㆍ의원에 대한 리베이트를 전담하라"는 식으로 압력을 가했는지 등을 파악하겠다는 것이다. 현재 다국적 제약사들이 국내 제약사와 공동 판매에 나선 제품은 50여건에 달한다.

이에 대해 한 다국적사 관계자는 "회사의 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해 특허 소송을 제기했을 뿐 국내사의 복제약 출시를 막기 위한 것은 아니다"며 "본사의 엄격한 윤리지침에 따라 사업을 진행하는 만큼 우월적인 지위를 남용해 국내 제약사를 압박하는 일은 전혀 없다"고 반박했다. 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

<용어풀이>

◆에버그린 전략=다국적 제약사가 오리지널 신약의 독점기간을 늘리기 위해 취하는 모든 행위.신약의 원천특허가 끝나기 전에 약의 형태 성분 구조 등을 일부 변경한 뒤 후속특허를 출원해 특허기간을 연정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