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100년 뒤의 진실 "난 독살 당했다"

"중국 국가중점문화공정팀은 광서제(光緖帝)의 유골에 독극물 화학실험을 한 결과 모발과 위장에서 치명적인 분량의 비소 성분이 검출됐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청사편찬위원회는 조만간 광서황제 사인보고회를 열 예정이다. "

청나라 11대 황제인 광서제의 사거(11월14일) 100주년을 앞둔 지난달 초 홍콩 문회보가 전한 뉴스다. 황제는 비상에 의해 독살됐으며,누가 황제 독살에 가담했는지 밝혀내는 것이 새로운 과제가 됐다는 내용이다.

궁정 내 독살은 흔하다면 흔한 일이다. 하지만 황제의 비운에 찬 삶은 청조 몰락에 오버랩되면서 한편의 잘 짜맞춘 비극이 됐고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던 만큼 황제의 사인을 둘러싼 수수께끼가 풀렸다는 소식은 바로 주목을 받았다.

광서제는 다섯 살 나던 1874년 이모뻘인 서태후의 지명으로 황제가 됐지만,서태후의 권력과 전횡을 위한 '장치'로서 일생을 살았다.

단 한번 1898년 강유위 양계초 같은 개혁파와 손잡고 변법을 단행했지만 원세개의 배신으로 찻잔속의 태풍으로 끝나고 말았다. 100일 만에 궁정쿠데타로 재집권한 서태후는 28세의 황제에게 사실상의 퇴위 선언을 명했다. "짐이 병들어 황태후가 다시 섭정하신다(帝遇疾, 皇太后復訓政)"는 단 아홉자였다. 환관에게 끌려나간 황제는 만 10년 동안 이화원의 옥란당과 중남해 영대를 오가며 서태후의 포로로 살았다.

1908년 11월 용태가 심각해진 74세의 서태후는 서둘러 황제의 조카 세살배기 부의(溥儀)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마지막 황제' 선통제다. 곧 영대에 갇혀 있던 광서제가 죽고 이튿날 기다렸다는 듯 서태후가 세상을 떴다.

황제의 사인을 놓고 말들이 없을 리 없었다. 서태후 지령설,서태후가 죽고 광서제가 복위할 경우 보복을 두려워한 환관 이련영 또는 원세개 소행설이 나돌았다. 하지만 공식 사인은 긴 유폐생활로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던 심신피폐 때문이라고 발표됐다.

황제가 굴욕을 감수한 것은 만백성의 가장인 황제 스스로 왕조체제의 근간인 충효의 효를 깰 수 없다는 이념 때문이었다. 게다가 황제는 망국의 벼랑 끝에서도 영달만 꾀하는 서태후와 수구세력에게 철저히 포위되고 고립됐다.

1928년 여름 지방군벌 손전영이 서태후의 능묘를 다이너마이트로 깨트리고 입속에 물고 있던 여의주보다 더 큰 구슬을 빼갔다. 상대방이 엎드려 아뢰는지 어찌 알겠냐며 전화 사용도 거부했던 '만세(萬世)권력'은 단 20년도 못가 이렇게 시궁창이 됐다.

서릉의 광서제 능묘 역시 도굴됐지만,그나마 유체는 창고에 수습됐다. 독살자들이 얼마나 많은 비상을 썼는지 황제의 유체는 육안으로 보기에도 복부와 옷에 허옇게 흘러 녹아내렸다고 한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하지만 법의학에서 '죽은 자는 온몸으로 말한다'고 한다. 광서제도 죽은 지 100년이 돼서야 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우종근 편집위원 rgbac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