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 "얼빵한 건달로 확 망가졌죠"
'매력남' 이정재(35)가 무너졌다. 까불다가(?) 주먹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할머니에게 어리광 부리고 침을 흘리며 미녀를 쫓아다닌다. '태풍' 이후 3년 만에 출연한 영화 '1724 기방난동사건'(감독 여균동)의 천둥 역이다.

방송드라마 '모래시계' 이래 13년간 구축해온 깔끔하고 정제된 이미지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연기 인생에 '망가지는' 배역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게 마련이지만 톱스타가 이처럼 자청한 것은 이례적이다. 다음 달 4일 개봉을 앞두고 서울 순화동 라마다서울호텔에서 그를 만나 사연을 들어봤다.

"완성본을 보고 저도 놀랐습니다. 시나리오에 없던 배경 설명 자막이 할리우드 '마블코믹스'처럼 처리돼 있고 '팍''끼익' 등 효과음도 장면들에 삽입돼 한 편의 만화 같은 느낌을 주니까요. 천둥 역은 단순히 이미지 변신 차원에서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당시 읽은 시나리오 중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이런 코미디를 내가 할 수 있을까 의심도 했지만 여균동 감독이 워낙 재미있는 분이라 출연을 결심했죠."

'1724 기방난동사건'은 조폭코미디의 조선시대 버전.영조 즉위 직전인 1724년 기방 명월향과 장안 최고의 기생 설지(김옥빈)를 둘러싸고 천둥(이정재)과 만득(김석훈) 등 '주먹'들이 벌이는 싸움을 유쾌하게 그렸다.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랑보다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현대 사회를 비판하면서 순수를 환기시킨다. 여기서 동네 주먹 천둥은 설지를 차지하기 위해 전국구 주먹왕에 도전장을 낸다.

"설지에게 반해 침을 흘리는 연기는 정말 하기 싫었어요. '오버'의 극치였으니까요. 이런 과장된 연기를 해야한다니,처음에는 '닭살' 돋는 듯했지만 극 흐름상 필요했습니다. 코 흘리는 장면도 마찬가지고요. 싸움 신에선 흙을 씹기도 했는데,뱉지 말고 삼켰더라면 더 실감났을 거란 생각이 나중에 들더군요. "

그는 '각 잡힌' 연기가 이미지에는 도움이 되지만 배우 입장에서는 장난 같고 과장된 연기가 더 재미있다고 했다. 특히 30대 중반에는 인기에 연연하기보다 좋은 작품과 배역을 맡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바른 생활 사나이' 김석훈도 분 바르고,입술 화장하고,온 몸에 장신구까지 치장한 '똘 기(또라이 기질)' 넘치는 만득 역을 맡아 웃깁니다. 이런 언밸런스가 웃음을 자아내는 원천입니다. 그의 연기를 보면서 저 친구 제 정신인가하는 의구심마저 들더군요.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니 스크린 속 이미지와는 딴 판으로 원래 유머러스한 성격이더라구요. "

언밸런스와 파격은 출연진의 패션에서도 드러난다. 등장 인물들은 옛날 상투머리 대신 스포츠나 상고 머리다. 또한 한복 대신 스판이나 메탈 소재의 옷,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즐겨 입는 현대식 정장과 드레스까지 선보인다. 한 마디로 사극의 규칙을 깼다.

그는 작품을 선택할 때 자신의 캐릭터를 잘 살려낼 수 있는지를 먼저 살핀다고 말했다. 그리고 어떤 배역이든 소화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강조했다.

해외 진출에 대해서는 동료 배우들에 비해 초연했다. 홍콩 무협액션영화나 일본의 판타지 액션영화 출연 제의를 받았지만 시나리오와 배역이 흡족하지 않아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는 "해외 활동 목적으로만 출연할 생각은 없다"면서도 "하지만 좋은 작품과 인연이 닿는다면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